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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지식채널e 용서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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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inuit-_] 쪽지 캡슐

2012-06-25 ㅣ No.1561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그런 슬픈 역사는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덮어두면

오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마음이 아프더라도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서

그것이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서 화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뼈아픔을 절대로 피해서는 안 됩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

 

 

 

과거 청산이란 부당한 행사나 불법 행위로 인해 일어난 피해 문제로서

진상 규명과 피해 규제, 명예 회복 등을 통해 피해자의 한을 풀고

국가와 가해자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과거에 일어난 죄를 다시 환기시켜 정의를 실현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여

궁극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대하는 길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청산의 방법에 대해 역사가 볼프손(Wolffsohn)은

4W(Wissen[앎], Werte[가치], Weinen[슬퍼함], Wollen[의지])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즉 과거청산이란

1. 앎: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하고,

진상규명을 해야하고,

2. 가치 : 그때 일어난 일이 옳았는가 틀렸는가,

가치를 판단해야 하고,

3. 슬퍼함: 피해자의 슬픔을 이해하고 동참하며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슬픔을 사회화해야하고,

4. 의지: 이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함을 말하는데

제도의 시선이 필요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피해가 왜 일어났으며, 지속되었나를 밝히는 일은

곧 가해자와 가해의 구조를 밝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제도의 시선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폭력이 가능했던 제도나 구조를 밝혀내는 일이며,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는 권력의 연쇄 체계(입안자, 명령자, 행위자)를 밝혀야 하고,

권력의 연쇄 체계를 밝히는 일은 책임의 문제로 귀착되고 또한 이런 책임은 사회화해야합니다.

이는 곧 국가와 사회를 인간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정치권력에 의해 발생된 폭력, 학살, 고문과 같은 범죄는 분명히 책임주체가 있으며,

그러한 원인의 제거, 책임 소재와 책임 주체가 규명되지 않으면

그러한 범죄가 재발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정확한 책임소재 규명과 응분의 처벌만이 반복 의 악순환을 막고서

화해(reconciliation)로 나갈 수 있는 길이며.

이것이 사회 내에서 신뢰의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 됩니다

분명한 피해자가 있는데도 가해의 사실이 규명되지 않거나 가해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공권력의 신뢰성은 확보되기가 어렵습니다.

 

 

국가폭력의 진상의 규명과 책임자의 규명과 처벌은

일종의 사회적 정신치료, 국가적 정신치료가 부를 수 있습니다.

개인의 병과 달리 사회의 병은

진실과 정의를 통해서만 치료될 수 있습니다(Healing with Truth).

물론 이러한 정신치료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겉으로 사회는 유지될 수는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 도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건강성, 즉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과 규범, 도덕률이 밑으로부터 무너진 상황이 초래됩니다.

 

용서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지만,

용서는 진상의 규명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자행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용서와 관용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과거청산은 일차적으로는 정의의 수립, 인권의 보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그것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질병을 치료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웃나라에 고통을 안겨준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치 않을 때,

양국이 새로운 갈등이나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가간의 진정한 평화는 구축되지 않을 것입니다.

 



[독일의 과거청산]

 

독일은 일본과는 달리, 히틀러 정권 하에서 자행된

참혹한 비인간적인 범죄에 대한 속죄에 대해 적극적이었습니다.

전후 일본 정치가들이 '불행했던' 과거에 아직 사과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애매한 '유감' 표명을 하는 데 그치고 있는 반면,

독일 정치가들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려는 노력을 줄곧 보여왔습니다

과거 브란트 수상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영령 앞에 참배하면서 무릎을 꿇은 것이나,

1985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40주년을 맞아 당시 대통령이던 바이체커 대통령이

국회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연설을 한 것이 그 사례 입니다.

게다가 독일은 역사교육이나 역사교과서, 그리고 일반 대중들에 대한 정치교육에서도

히틀러 정권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 외부에 의한 과거청산 : 1960년대 이전의 과거 청산

 

독일도 처음에는 , 죄책감보다는 스스로 히틀러와 전승국의 희생자라는 피해 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으며

반유태주의적 사고방식도 여전했습니다.

또한 1950년대 말까지 홀로코스트나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에 관한 문제는

공공 여론에 의해 거의 들춰지지 않았습니다.

독일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회복과 민주주의 실현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이런 상황 속에서 나치청산 같은 과거 극복 문제는 최대한 덮을수록 좋은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게다가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나치 전력자라는 이유로 각 분야의 엘리트들을

마냥 정계에서 배제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 과거 극복을 둘러싼 분위기 쇄신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가능했다.

 

그 계기 중 하나는 1959년 유태인 묘지와 회당이 하켄크로츠로 도배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내외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여론은 충격을 받았고,

학교 교육은 물론이고 국민을 상대로 한 민주주의 정치 교육에 내재된 결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자성의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독일인들이 과거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유태인 학살이나 나치의 범죄 행위가 중심주제가 되었습니다.


 

 

■ 학살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 논의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6년 5월 29일 헷센(Hessen)주에 제정된

“나치전법처벌에관한특별법”은 “나치통치기간 동안에 정치적, 인종차별적 또는반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처벌되지 아니한 범죄에 대하여는 소추 되어야 하며,

또한 법률, 법규 명령, 나치 정부나 권력자의 명령에 의해 무죄로 선언되었거나

범행 후 적법하다고 선언된 경우 또는 행정관청의 명령에 의해 소추되지 않거나

형사공판 절차가 새기 되지 않거나 중단된 경우에도 소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효가 문제되자 1964년 4월 13일 공소시효계산에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5년까지 정치적인 이유로 소추 되지 않았던

나치 시대의 불법 행위들을 처벌하기 위해 제정된 것 으로

국가정의 또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대 명제 앞에서는

공소시효는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없고,

정의와 법적 안정성<공소시효>이라는 가치가 충동할 경우에는

정의를 우선시하여 처벌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과거청산의 의미 확대와 실질적인 보상

 


1956년에 제정된 독일연방보상법에 따르면, 그 보상의 대상을 독일국민이거나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주민으로 제한됨으로써

전쟁 당시 독일과 적대적이었던 국가의 국민이 여기에서 제외되었고,

따라서 대다수의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은 애초부터 그 보상의 근거를 박탈당했습니다.

 

1970년대에 폴란드는 보상문제를 강력하게 요구하자

1975년 서독이 폴란드에 경제차관이란 명목으로 10억 마르크를,

그리고 폴란드 출신 강제노동자들의 연금청구를 상쇄하는 대가로

13억 마르크를 제공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강제노동자 보상문제는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법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적어보였지만

기업가들의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면서 여론의 공세를 받게 되었고 ,

 

1999년 2월 독일 굴지의 보험회사, 은행 및 대기업들이 강제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그 재단건립을 위한 발기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독일 정부, 미국 정부, 동유럽 및 유대인 희생자

그리고 경제계 대표들이 모여 이 재단건립에 관한 협상을 개시했습니다.

 

결국 독일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기금을 출연하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라는 이름의 재단을 설치하려는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 진실된 역사교과서 서술을 위한 노력

 

 

1950년대의 교과서는 , 나치 이후의 반유대적인 정책은 부차적인 정도만 다뤄졌으며,

반인륜 학살에 관한 내용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었습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는 일부의 교과서가 나치의 과거에 대해 사진과 사료 표본을 제시하여

축소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태도가 나타나기 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서술시점에서 희생자의 관점은 여전히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70년대에 이르러 68학생운동의 지도이념이기도 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 인기를 끌면서,

나치 과거에 대한 성찰이 제고되었습니다. 그리고 1978∼79년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현상의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매우상세하고사실적으로 정확하게 서술되었으며 ,

관련자료 또한 매우 생생하게 제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역사 교육의 목표가 그저 역사 지식이나 역사 연구의 성과를

단순히 암기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룰 줄 아는 지적 역량 함양에 있다는 것이 일반화 되었고.

1990년대가 되면서 유대인 중앙위원회와 교원노조가 설립되고

교과이수지침과 교과서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 졌습니다.

 

다양한 독일의 역사교과서는 히틀러 정권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는공통점을 갖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기초단계에서는 나치 집권 이전의 과거사 중심으로 사실 전달에 치중하고,

심화 단계에서는‘민족주의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제목을 통해

다양한 시각을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을 갖도록 교육합니다.

 

특이할만한 것은 1996년 이래로 발간 된 역사교과서에는

나치 정권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유대인 투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서술됐다는 점입니다.



글출처: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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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의 최종 목표는 교과서가 아니라
'보통국가'로의 회귀"이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962029



 

여기서 말하는 '보통국가'란, 군대를 보유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를 의미한다.
물론 일본은 이미 자위대라는 실질적인 군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일본 우익이 바라는 것은 자위의 무력뿐만 아니라 파병 등
타국의 분쟁에도 개입할 수 있는 '군사적 정상국가'의 건설이다.


이를 위해선 1946년 연합군 점령 아래서 시작된 평화헌법 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특히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 9조는 일본 우익들의 주요 타깃이다.


이 조항은 일본이 국제분쟁 해결에 있어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이를 위해 육해공군을 비롯한 기타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새역모가 발행한 교과서가 지속적으로 '평화헌법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고스란히 서술한 교과서는
이들의 입장에선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


새역모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점차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새역모의 역사 교과서엔 △태평양전쟁을 아시아 국가들의 해방을 위한 '대동아전쟁'으로 미화하고, △일본군 위안부·난징대학살 등의 전쟁 범죄는 '날조'이며 △일본이 식민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의 밑바탕이 됐다는 등의 기술이 태연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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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사관의 등장


새역모 출범의 산파역은 '자유주의사관'의 대두와 활동에서 찾아져야 하며, 그 주역은 다름 아닌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교육학)의 '전향'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겠다. 장본인의 얘기를 빌어 자유주의사관의 탄생과 '자유주의사관연구회' 출범의 전말을 들여다보자.


후지오카가 "근현대사 교육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역사관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는 1990년 8월 발발한 걸프전과 1991년부터 이듬해까지의 미국 체재 경험 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걸프전은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의 '평화주의'의 이상이 국제정치의 현실 속에서 파탄했다는 것을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더구나 미국에 체재하는 동안에 걸프전에 120억 달러를 헌납했는데도 일본에 비난이 가해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위대가 전쟁터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게다가 동구와 소련에서 연이어 전해지는 냉전의 붕괴는 일본에게 '국익'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자세를 압박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후지오카가 '역사개찬' 운동에 나서게 된 또 하나의 충격이자 계기는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국익이 관건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세계의 군대가 '위안부'나 그런 부류의 제도를 갖고 있는데, 일본인만 음란하고 어리석은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인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일본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일본의 '국익'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이다.


1994년부터 관련된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다가 스스로 '근현대사 수업을 개혁'하기 위한 계간 잡지를 창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1995년 1월 결성된 자유주의사관연구회는 바로 그 잡지의 필진을 조직하기 위해 꾸려진 모임이었고, 후지오카는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이런 후지오카였기에 1996년 6월 28일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담은 중학교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자, 문부대신에게 정정 신청을 권고해 달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술이 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은 '일본인에 대한 치욕'이며, '강제연행' 또한 전혀 근거가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사관의 골격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자학사관'의 박멸이다. 후지오카에 따르면 기존의 역사교육은 "일본인이 일본이라는 국가에 혐오감을 갖도록 만드는 교육"으로 치부된다. "자국민을 인류사에 유례없는 잔학무도한 인간 집단으로 꾸며, 자국사를 악마적 소행의 연속으로 그리"며, "자국에 채찍질하고, 저주하고, 욕하고, 규탄"하는 "역사적 관점, 정신적 태도", 그것이 바로 자학사관의 정의이다. 이런 자학사관을 만들고 퍼뜨리는 주범으로 지목한 것은 매스컴과 교육계이며, 대표적으로 <아사히(朝日)신문>과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이 해당된다.

 

새역모의 탄생


후지오카와 더불어 새역모 창립과 활동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독문학)였다. 스스로를 '보수계 언론인'이라 칭하던 니시오는 후지오카에 대해 "교육학자이며, 지난 전쟁은 자위전쟁인가 아닌가를 놓고 대담한 논쟁을 수업에 도입하는 실험가로서 신문에 소개되었"다고 평한 바 있다. 1996년 3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얼마 안 있어 앞서 얘기한 중학교 교과서의 검정 통과 소식이 날아들었다. 후지오카와 니시오는 '역사교과서가 위험하다'는 부제의 저서 <국민의 방심(国民の油断)>을 같이 저술하면서 '역사전쟁'의 동맹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역사교과서 내지 역사인식을 둘러싼 일본 내의 전선에서 언론전의 주공격수로 변신한 것은 <산케이(産経)신문>이다. 새역모 멤버들이 그랬듯이 <산케이신문>에게도 1996년은 커다란 전환기였다. 그 결과 1996년 1월부터 <산케이신문>의 오피니언 면에는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후지오카 자신도 <산케이신문>에 연재하게 됨으로써 "자유주의사관 연구회가 사회적으로도 주목을 받았고, 이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도 성대하게 행해지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후지오카와 니시오는 "현행의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역사인식을 개선하는 길이 요원하다는 판단에서" 다카하시 시로(高橋史朗, 교육학)와 사카모토 다카오(坂本多加雄, 정치사상)와의 협의를 거쳐 보다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가 같은 해 11월 13일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준비 모임을 열었고, 곧 이어 12월 2일 새역모를 창설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호소인·찬동인의 이름으로 지지자를 모아 1997년 1월 설립총회를 열어 임의단체로 정식 발족을 했다.


새역모의 발기 성명은 이들이 지녔던 문제의식과 전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일본 근현대사 전체를 범죄의 역사로 단죄하며 기술하고 있"으며 "증거도 불충분한 '종군위안부'의 강제연행설을 일제히 채용한 것도 이런 자기악역사관이 다다른 하나의 귀결"로서 "정처 없이 자국사 상실로 떼밀려 가는 국민지조 붕괴의 상징적 일례"로 성토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어느 민족도 예외 없이 갖고 있는 자국의 정사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를 각계에 호소"함과 동시에 "다음 세대에 자신을 갖고 전할 수 있는 양식 있는 역사교과서를 작성하여 제공"할 것을 천명했다.


창립 당시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회장에 니시오 간지, 부회장에 다카하시 시로, 사무국장에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신토[神道]학), 이사에는 이토 다카시(伊藤隆, 일본근대사), 사카모토 다카오, 다쿠보 다다모리(田久保忠衛, 국제정치학), 다나카 히데미치(田中英道, 서양미술사), 다네가시마 오사무(種子島経, 기업인), 나카지마 슈조(中島修三, 변호사), 니시베 스스무(西部邁, 평론가), 후지오카 노부카쓰, 하가 도루(芳賀徹, 비교문학), 그리고 이사 대우로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만화가) 등이다.


이렇게 전열을 정비한 후 새역모는 자학사관으로 물든 교과서를 시정하라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일본국 헌법의 개정을 줄곧 외쳐온 일본 최대의 우익단체 '일본회의'(1997년 출범)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자민당과 기존의 각종 우파 조직이 가세했다. 이들은 출범 이후 4년 만에 100권이 넘는 도서를 출판하는 동시에, 일본열도 각지에서 연간 700회 정도의 강연회나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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