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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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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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형 [largo7a] 쪽지 캡슐

2001-07-12 ㅣ No.4072

그리운 분

 

그의 이름은 홍 관 표 님이다.

얼굴은 미남형이었고, 고급장교로서는 하나도 흠잡을 데 없는 멋진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과 귀여운 아들 두 형제(?)가 있었다.

그 분은 내가 복무하였던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의 동부전선 어느 부대의  부대장이셨다. 나는 이 부대가 창설된 후,  최초의 정훈공보병으로 근무 명령을 받았다.

아마 그 분은 새로 전입한 신병들의 인사카드를 하나하나 다 살피셨던 같았다.

그 분 또한 신실하신 카톨릭 신자이셨기에, 나의 인사기록카드의 종교 난에 "카톨릭"이란 세 글자만  보신 후 나를 신뢰하시기 시작하셨다.  그 분은 성정(性情)은 마치 대나무 같았다. 어떤 청탁이나 부대 내의 비리를 용납하시지 않았던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1960년 대 중반기 때만해도 직업군인들을 제외한 다수의 의무 군인들은 후방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3년 동안 복무(服務)해야 할 부대가 전방이냐 아니면 후방이냐에 따라 물론 장단점은 있겠으나, 우리는 맑은 산수(山水)와 청정(淸淨)한 공기 그리고 수령이 겹겹이 표피(表皮)로 쌓인 늙은 소나무와 숲이 우거진 풍광이 아름다운 전방에서 근무하였다. 가을이 되면 산바람 따라 일렁이는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은색의 갈대 숲은 정말 장관(壯觀)이었다.  훈련 후 곱은 등살을 산허리에 눕히면 파란 하늘가에 바람결 따라 춤추는 은색 갈대 숲과 가을 산을 빠알갛게 물들인 단풍나무잎은 "모네"가 탐낼만한 정말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우리 부대의 전우들은 여름이면 대간첩작전의 일환으로 벌초 및 벌목작업과 취사장 땔감 나무도 하였고, 주로 훈련은 가을과 추운 겨울에 실시하였다.

그래서 입대하기 전 노동을 체험하지 못한 전우들은 항상 육체적으로는 좀 피곤하기는 하였으나, 전방에서 모두 동고동락하는 처지인지라 고참들이 신병들을 괴롭히는 나쁜 전통은 전혀 없는 편이었다. 사병들의 정신적인 고통이 거의 없었던 것이 우리 부대의 장점이며 동시에 강점이었다.

 

가을 기동훈련이 끝난 다음날 새벽 기상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남아있는 데, 본부중대의 비상(非常) 종이 울렸다.

본부 중대원 장병들 모두 완전 군장한 후 5분내에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당직장교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본부 중대 부대원 전원이 연병장에 집합하여 도열하자, 홍관표 부대장님 자신도 완전군장을 하시고, 실탄이 장전된 칼빈 총 한 자루를 들고 나타나셨다.

연병장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부대장은 총의 명찰에 씌어 진 사병의 이름을 호명하였다.

그 사병은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서너 차례 호명해도, 호명된 사병이 나타나지 않자, 부대장 님은 본부중대장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 칼빈 총을 중대장에게 넘겼다.

호명된 사병은 통신실의 야간보초근무자 중 맨 마지막 순번의 사병이었다.

약 1주일간의 기동훈련을 마친 후라, 부대장님은 사병들의 경계근무태세를 점검하셨던 것이다. 그 사병은 새벽이 되자 통신실 외곽초소에서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방심한 체로 통신실에서 실탄이 장전된 칼빈 총을 복부(腹部) 위에 올려놓고 깊은 잠이 들었다.

부대장님은 이 때 부대 외곽초소를 순시하였다.

부대장님은 잠들어 있는 초병의 배위에 놓여 있는  총을 가지고 가셨다.

야간보초근무자는 잠자고 있던 중, 비상이 걸린 후에야 그 큰 사건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병은 극도의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부대 내 어딘가에 숨어버렸던 것이다.

이 근무태만사건은 우리 부대가 창설된 이후 처음 발생한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나이 많으신 인사계가 본부 중대원 전원에게 들려주었다.

본부중대장은 중대 징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사실 징계위원회의 결과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사병은 100% 영창(군대감옥) 감이었다.  

 그의 처벌은 불가피하였다.

본부중대장도 부대장님의 뜻이 그 사병을 영창에 보내라는 명령으로 받아 들였다.

그 사병이 자대(自隊)감옥살이를 해야 할 기간만이  징계위원회의 결정사항으로 남았다.

징계위원 중에는 그 사병의 대학 동기였던 ROTC 장교도 있었다.

그들도 대학교 동기인 그 사병을 도울 길이 없었다.

그 때 본부중대장 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부대장님의 전화였다.

" 알았습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본부중대장의 표정이 밝아왔다.

"그 놈 말이야. 용꿈 꿨어 ! 부대장님 명령이야 . 인사계는 그 놈을 일주일 동안 화장실 작업을 시키도록 하시오."

우리 부대장병들은 두 번 놀랐다.

첫째는 새벽의 연병장 비상집합과 보초근무자의 근무지 이탈과 "칼빈"총 사건이었으며  

둘째는 원칙주의와 군기를 무엇보다도 강조하며 솔선수범하셨던 부대장님의 사병에 대한 처벌은 너무나 가볍고, 의외였다. 근무태만을 용서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 분의 가슴에는 부하에 대한 사랑을 지니셨던 것이다.

그 보초근무사병 사건 이후 우리 부대 장병들은 홍 관 표 부대장님을 마음으로 존경하며 따랐고, 따라서 모든 장병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부대장님을 형님처럼 믿는 분위기는 어떤 일이든  명령에 앞서 스스로 실천하는 부대기풍을 진작시켜 나가는 또 다른 전통을 수립하였다.

더 놀랍고 기쁜 것은 부대장님의 용서를 받았던 그 사병은 제대하기 전, 영세성사를 받았고,

지금도 나와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밤은 이미 고인이 되신 부대장 홍 관 표 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그 분이 생전에 즐겨 애청하셨던  "오 대니보이"를 글과 함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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