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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과 물질이 충돌할때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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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4-09 ㅣ No.171361

찬미예수님

 

무지하게 반갑습니다.

빨간 글씨가 계속 있어 차가 막혀 포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2층까지 꽉 찼네요.

늘 하는 말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깜빡 잊어버릴 수 있는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불러 주셔서 오셨다’는 겁니다.

누구 차를 타고 가나, 몇 명이 가나, 가서 어디서 잘 것인가 등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일을 꾸며 여기 오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니라는 것이죠.

하느님이 허락지 않으면 이 성지에 발을 디딜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아멘.

 

은총의 밤 강론은 적어도 보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이 어린아이 얘기였죠?

한참 준비하고 있는데 ‘신부님께 공개질문 합니다.’하는 이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공개질문 했으니 이번 은총의 밤에 공개적으로 답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은총의 밤은 유투브로 전 세계로 생중계 되는 것 알고. 저희들도 반드시 보겠습니다.

뭘 질문했을까 궁금하죠?

 

본인은 가톨릭 실업인회원인데 회사를 운영하니 늘 돈과 물질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대요.

그런데 가톨릭 신자 사장들이 모여서 얘기할 때 마다 우리 교회에서 얘기하는 물질과 소유에 대한 개념이 뭔가?

소유물에 대한 크리스챤적인 개념과 어떤 확신을 가지고 크리스챤 기업가로서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 소유물에 대한 크리스챤적인 개념을 확실하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질문하신 것에 대한 답을 준비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질문했던 기업가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영과 육의 부딪침, 속과 성의 부딪침, 물질과 정신의 부딪침,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다 들어본 것이지만 이 답을 저는 네 가지 정도 요약해 보았습니다.

소유물에 대한 크리스챤적인 개념과 확신이 있을 때 세상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옛날 공과책에 보면 ‘천주사랑과 재물사랑은 함께 사는 못 하느니,’가 나와요.

한마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재물에 대한 사랑은 같은 차원으로 병행할 수 없다는 거죠.

우리는 진정 이 세상 재물의 위치를 어떤 마음으로 소유해야 합니까?

죽을 때까지 물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서 이 물질에 대한 개념과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다.’라는 방향으로 선용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원칙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분의 물음에 대하여 다시 반대로 네 가지의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첫째, ‘내 소유물의 참 주인은 누구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의 참다운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신적 있습니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경영 밖에 못합니다.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내 생명부터 모든 것에 대한 경영권만 있을 뿐 소유권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있습니다.

 

교우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 교우가 몸에 밴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분은 정말 신앙인 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어떤 분이시냐?

끝까지 자기 것이라는 말을 안 합니다.

‘하느님의 자식이지요.’ ‘제 몸뚱이가 어다 있어요? 성령이 머무시는 궁전이죠.’

‘제 돈이 어디 있어요? 제가 잠시 하느님 뜻대로 보관할 뿐이지요.’

다시 말해 양보 대명사, 사랑의 대명사를 쓰는 사람은 저는 삶도 그렇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나의‘ 라는 소유대명사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몸, 내 집, 내 재산, 내 자식.

여러분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잘 아실 겁니다.

농사를 지어서 창고 하나가 모자라서 다른 창고 새로 짓고 추수한 것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가득 찬 창고를 바라보면서 말합니다.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이제부터 실컷 놀고 마시고 즐기자.‘ 스스로 자축을 합니다.

그때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죠.

’어리석은 인간아. 오늘 밤 내가 네 목숨을 걷어간다면 저 창고의 재물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너는 어찌 나에게 그렇게 인색하면서도 너 자신에게는 그렇게 관대하게 살아가느냐?‘

영혼이 어찌 자기 것입니까? 자식이 어찌 자기 것입니까?

자식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양대로 잘 키워주는 역할만 할 뿐 절대 소유물이 아닙니다.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 내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기업가가 한 질문의 답을 굉장히 명쾌하게 이천 년 전에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또 어리석은 청지기 비유 등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청지는 뭐 하는 사람입니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선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없다고 주인의 재산을 자기 것인 것 양 흥청망청 쓰다가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요절이 난다는 어리석은 청지기의 비유가 나옵니다.

또 어떤 청지기는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나중에 쫓겨난 다음 빌붙을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주인에게 빚진 사람을 제 마음대로 탕감해주죠.

‘내가 지금 탕감해 주니까, 나중에 내가 쫓겨나면 나한테 알아서 해.’

주인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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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내 모든 것의 주인도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관리인이요, 겸손한 경영자일 뿐입니다.

관리인은 주인의 것에 대하여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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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데레사 성녀는 ‘홀로 하느님만이 족하다. 하느님만 가지면 세상을 갖는 것이다.’하십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세상을 가지면 하느님도 덤으로 따라오는 줄 압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악세서리 하나, 취미 하나, 고상한 종교 하나 갖고 있는 것입니다.

데 데레사 성녀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자는 세상 것을 다 소유합니다.

우상이 뭡니까?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다 우상 덩어리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느님보다 자식이 윗자리에 있다고 하면, 자식이 우상일 겁니다.

그런데 자식에게 축복을 주는 분은 분명히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자식보다 밑자리에 놓고 어찌 축복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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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유물은 참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여러분들이 가슴에 새기지 않고

또 어떤 상황에 합리화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또 영원히 우상숭배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홀로 하느님만이 족하다.’는 데 데레사 성녀의 말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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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영혼의 가치와 재산의 중요성이 부딪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합니까?

하루에도 일 년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부딪칩니다.

쉽게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 주일 미사 때 헌금 낼 때마다 갈등 없으셨습니까?

천 원짜리 냈다가 집어넣고 오천 원짜리 냈다가 집어넣고, 오늘은 만 원을 낼까, 뭘 낼까?

미사 하는 그 거룩한 순간에도 물질과 영혼은 부딪칩니다.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들은 질 때가 많습니다.

내 양심은 ‘오늘은 신부님이 사임당 누님 좀 만나게 해 줘.’ 말해도 세종대왕만 오십니다.

 

사람의 영혼이 인간의 소유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재물도 인간의 영혼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재물과 자기 영혼을 바꿀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하더라도 내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권 맞은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통계 나왔다고 그러죠. 복권 때문에 완전히 망해 버립니다.

거지가 되고 바람나서 집안은 풍지박살이 되고, 살인까지 일어났다고 그럽니다.

형제지간에 의가 다 상해버립니다.

그 사람이 맞는 복권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내 영혼과 재물이 부딪칠 때 비록 불편하고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해도 영혼을 살려야합니다.

 

세 번째 질문은 재산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벌어야 된다.’입니다.

부당하게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투기하고 속여 가면서 돈을 벌면 안 됩니다.

어떤 포목상 주인이 자로 천을 잴 때마다 두 손가락 짧은 천을 끊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천을 끊을 때마다 자기 영혼을 떼어서 마귀한테, 돈 통에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정직과 희생과 명예에 의하여 버는 돈만이 하느님이 축복하시는 돈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부당하게 번 돈 가지고 어찌 행복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남을 속여가면서 번 돈으로 해먹는 밥이 살이 되겠습니까, 해 먹는 고기가 피가 되겠습니까?

다른 이 가슴 아프게 하지 않고, 부당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정당하게 땀 흘려 벌어야 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은 그러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재물을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소유한다는 것에 만족감을 갖고 죽을 때까지 한 푼도 쓰지 않고 그저 소유만 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가 굶어 죽었는데, 그 사람 집을 청소해보니 장판 밑에 오만 원짜리가 깔려있었대요.

모으기만 했지, 감추기만 했지, 아까워서 본인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쓰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완전히 이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악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리대금, 뇌물, 남을 부패시키는데 들어가는 돈, 남을 망가뜨리는데 쓰는 돈,

이런 것들은 악한 데 사용되는 돈입니다. 부정한 돈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재물은 가난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내가 가진 제물을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가진 재물을 선용해야 합니다.

 

지금 드린 이야기는 본당에서 평상 시 많이 들었던 얘기지만 정리를 다시 해드렸습니다.

 

‘천주 사랑 재물 사랑 함께 사랑 못하느니,’

그렇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지혜롭게 분별 있게 그 재물을 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에, 또 지금 현재 물질과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기도도 잊은 지 오래고

 신앙도 잊은 지 오래고, 평화도 잊은 지 오래라고 한다면,

절대로 어리석은 부자나 어리석은 청지기가 되지 말고 늘 겸손한 청지기로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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