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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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강론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오스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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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8-03-09 ㅣ No.118857

 

 

마르 12,28-34(사순 3 )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 <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2,10)라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의 표현을 빌면,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81,11)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존재차원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사랑의 계명<신약>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요?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으로 한정하면서(레위 19,18)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레위 19,34)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며,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해줍니다(마태 5,48).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하느님 사랑<레위기>(19,18)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남편에게는 아내가 하느님이요,

상인에게는 손님이 하느님이요,

본당신부에게는 본당신자들이 하느님이요,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요,

나에게는 공동체 식구들이 하느님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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