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EBS 지식채널e 동아일보 해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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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son1148] 쪽지 캡슐

2011-02-12 ㅣ No.1422

 

 



 

 “비겁한 자 물러나도 용감한 자는 굳셉니다.
 

우리는 언론자유 투쟁에 순사(殉死)하렵니다.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 위해서….

우리의 싸움 앞엔 승리만이 있을 것입니다”.

 

 ‘위장 자유언론에 통탄하며’ 中

 

 

 

 

 

 

1974년 1월 8일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 1,2호로 인해 대한민국의

모든 미디어는 유신헌법을 반대, 부정, 비방하는 모든 발언 행위에 대해 

일체 보도할수 없게 되었고 , 중앙정보부요원들은 아예 모든 신문사, 방송사에 상주하며

기사를 일일이 사전검열하였습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은

동아일보 사옥에 모여 언론노조를 결성하고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함으로써

강요된 침묵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사회와 자유국가 발전을 위한 기본적 사회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고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자유언론은 언론 종사자들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이 허용해 주는 것이 아니다” 라고 분명히 밝히고,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결의 사항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2.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3.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이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당시 정권은 물론 

민주회복을 갈망하던 재야 민주세력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광고탄압을 당하던 동아일보에

격려광고의 봇물을 터뜨린 결정적인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의 전면광고로서

'언론史'에서 가희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수 있는 광고.

 이 의견광고는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비롯해

74년 7월부터 75년 1월 3일까지 열린 64차례의 인권회복기도회에서

발표된 결의문, 메시지, 선언문 등의 요지를 수록해 매우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킴

   

 

불안해진 유신독재정권은 동아일보,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동아일보와 동아 방송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매체에 광고수주가 끊기고 기존의 광고주들은 아무 이유없이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급기야 1974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는

4개의 면을 하얗게 비운채로 발간되었습니다.

 

 백지광고사태의 여파는 국경을 넘어 해외의 언론들도 주시하게 되었습니다.

 뉴욕타임스, BBC, 르몽드가 이를 의미있게 보도했고

워싱턴 포스트는 " 유령이 동아일보를 삼키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재야 종교 사회단체들은 정부를 비판하는 한편

탄압받는 동아 돕기를 전 국민에 호소했으며

동아일보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격려하고자 하는

힘없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십시일반으로 마련된

격려광고들이 빈 광고지면이 매워지게 되었습니다.

 

 

 

 

 

 

광고사태가 장기화되자 동아의 경영진은 권력 앞에 무릎을 꿇기로 작심하고

자유언론운동에 앞장 섰던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임하고 나섰고,

이에 맞서서 기자, PD, 아나운서들은 1975년 3월 12일 긴급총회를 열고

해임직원의 즉각 복직을 요구하며

신문, 방송, 잡지의 제작을 거부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농성 엿새째인 3월 17일 새벽, 회사측은 술 취한 폭력배와 보급소 직원 등 200여 명을 동원하여

농성중인 기자, PD, 아나운서 등 150여 명의 사원들을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젊은 기자들은 강제 해산 다음날인 3월18일 신문회관에 모여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자유언론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임을 다짐했습니다.

 

 

 1975년 동아투위는 동아일보 옛 사옥에서 프레스센터를 왕복하며 6개월 동안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날부터 9월17일까지 꼬박 6개월 동안 ‘동아투위’는

그 서슬 푸른 유신의 긴급조치 아래서도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동아일보사 앞에 도열하여

회사측의 국민에 대한 배신과 권력의 폭거에 항의하고,

당국의 압력과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보도되지 못했던 민주,인권 사건일지" 등의 유인물을 제작 배포했습니다.

 

 언론자유를 위한 이들의  투쟁은 험난했습니다.

해직 기자들은 우선 권력으로부터 각종 탄압을 받았습니다.

해직 기자 개개인에 대한 감시와 연행, 구금이 일상적으로 행해졌고

많은 해직 기자들이 이러 저러한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이중 몇 명은 구속되어 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이들중 상당수는 정보당국의 등쌀에 못이겨 아예 낙향을 해서 농사를 짓거나

음식점을 차리는등 자영업으로 나서기도했지만

대부분의 해직기자들은 부당한 권력에 굴하지 않고

1980년 " 해직 언론인 협회"를 거쳐 1984년 민주 언론 운동협의회(민언협)을 결성,

기관지'말'을 발행하는 등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메가폰 역활을 톡톡히 해나갔습니다.

 

 

한겨례 창간호

 

 

  1987년 6월 항쟁이후 궁지에몰린 전두환 정권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신문창간의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1987년 9월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주측으로한 전현직 언론인들 196명은

'새로운 신문'의 창간을 발의하고 10월에는 3000여명이 참가하는 창간 발기인대회를 열었습니다.

 

새로운 신문을 위한 공개모금은 108일동안 성황리에 이어져

총 2만7천명이 참여, 50억원의 창간기금이 모였습니다.

이것이 '언론 국민주 운동'이었습니다,.

 

그해 12월, 세계 언론사상 최초로 지배주주, 사주가 없는 언론사

한겨례 신문사가 세워졌습니다.

 

고장난 중고윤전기를 들여와 수리하고 전세공장에 편집국을 차렸지만,

한겨례 신문사는 그 탄생의의와 취지에 걸맞게 데스크의 전횡을 허락하지 않는,

민주적 편집위원회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참언론 지향을 위한 윤리강령을 채택하였습니다.

 

1988년 5월 15일, 새벽, 백두산 천지연 사진을 1면 톱에 앉힌

36면짜리 한겨례 신문 창간호가 배포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진정한 자유언론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시사in 창간호

 

언론과 방송이  얼마만큼 공정하고 정직하게 보도되는가에 따라

한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삶이 달라집니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룬 복지공동체로 거듭나기도 하고,

사회적 양극화와 극단적인  부패로 썩어 문드러지는 공동체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독재정권의 폭력에 대항했던 동아일보의 해직 기자들과  국민들이 함께 만든 한겨레신문

그리고 

재벌권력의 부조리에 대항한  시사저널 해직 기자들과  국민들이 함께 만든 시사IN.

 

벼랑끝으로 내몰렸던 정직한 기자들에게 희망과 길을 열어 준것은

힘없고 가난한 우리 국민들이었습니다.

 

언론과 방송이 바로서거나 아니면 죽어버리거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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