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김복천은 슬펐지만, 샌디는 행복해요"

스크랩 인쇄

안은정 [up9080] 쪽지 캡슐

2006-02-16 ㅣ No.157

"김복천은 슬펐지만, 샌디는 행복해요"

 

혼혈 1세대 가수 샌디 김

 

70년대 말 연예계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샌디 김.

1958년 겨울 강원도 양구의 한 개울가. 살을 에는 매서운 날씨 속에 10살 된 소년 복천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국화빵 노점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복천의 어머니가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는 반갑게 다가갔다. 하지만 복천은 잔 자갈이 섞여 있는 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고 자기 얼굴과 살갗을 박박 문지르고 있었다. '깜둥이'라는 놀림을 받기 싫어 피부를 벗겨내려 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안고 한참을 울었다. 한국 이름 김복천(58), 영어 이름은 샌디 김. 70년대 한국에서 혼혈 1세대 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샌디 김의 어린 시절이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가로 활동 중인 샌디 김을 현지에서 만났다. 최근 하인스 워드가 수퍼보울에서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쥐면서 한국 내에서 혼혈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그에게 있어 한국은 '고난의 땅'이었다.

그는 생부가 누군지 모른다. 해방되고 2년 뒤인 47년 어머니는 미군에 성폭행을 당했다. "22살 어머니는 저를 임신하고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어요. 하지만 대구 수성못에 몸을 던질 때마다 사람들이 구해냈죠. 그렇게 생명은 건졌지만 삶을 건진 건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혼모가 검은 아이를 낳고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거든요."

'보호막'이 필요했던 어머니는 산골에 사는 22살이나 나이 많은 홀아비와 결혼했다. "그 분은 저희 모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아버지 친척분들도 저희를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였죠. "

7살 때 대구의 집성촌 마을을 떠나 강원도 양구로 이사했다.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어요. '잔인한 시절'이 시작됐죠."'깜둥이'라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매일 새벽 일어나 집에서 30리나 떨어진 곳까지 뛰어가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한번은 놀려대는 친구와 싸움을 하다가 병 조각으로 손등을 긁었다. 친구의 손도 긁었다. 붉은 피가 흘렀다. 그러곤 "야, 임마. 너랑 나랑 피부색은 달라도 피 색깔은 똑같잖아"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고교를 졸업했지만 마땅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연예잡지에서 유명 탤런트 이낙훈씨 기사를 읽게 됐다. "그 분이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 즉시 선생님을 찾아가 '전 이곳에서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미국 가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라고 애원했죠." 그러자 이씨는 '탤런트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결국 샌디 김은 69년 동양방송(TBC) 9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중견배우 한진희씨가 동기다. 이후 '검은 미소''수사반장''추적''113 수사본부' 등 다수의 TV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어릴 적 동네 콩쿠르를 휩쓸던 노래 실력을 살려 가수로도 데뷔, '잃어버린 고향' 등 히트곡도 발표했다. "그때가 한국 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주위의 호감어린 시선, 정다운 손길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81년 지인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왔다. "얼굴 색깔이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맘이 편했다"고 한다. 주유소에서 12시간씩 일하며 돈을 벌었다. 83년엔 미군에 입대했다. 시민권을 따 어머니를 모셔 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87년 드디어 어머니를 모셔 왔다. 5년 전부터 한인 아내와 함께 페인트업을 하고 있다. 샌디 김은 인터뷰 말미에 하인스 워드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그의 어머니가 워드에게 늘 겸손하라고 가르쳤다는 부분 있죠? 그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출처 : 중앙일보



1,151

추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