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7일 (화)
(백)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여성 시대의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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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3-11-11 ㅣ No.764

머리끄덩이녀’를 기억하는가. 자칭 진보정당의 공식 집회에서 독기 서린 표정으로 당 대표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던 그 맹렬 여성을…. 여성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정치권이나 시민운동 단체에서 활약하는 어지간히 당찬 여성들 말이다. 내란 음모 사건 피고인인 같은 당 소속 국회의원을 겹겹이 둘러싸고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 일행의 태반이 젊고 앳된 여성들이었다. 종북 혐의로 해산이 청구된 그 정당의 대표도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 “(모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나왔다”는 독설로 시청자를 섬뜩하게 만든 바로 그 여성이다.

 지난달 미국 연방정부의 셧다운 사태를 끝장낸 것은 민주·공화 양당의 강경파를 협상 테이블로 이끈 두 정당의 여성 상원의원들이었다. 우리의 여성 국회의원들도 소속 당의 강경파를 설득해 생산적인 토론과 합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을까. 위기에 내몰린 서민 경제, 날로 심화되는 양극화의 갈등, 풀리지 않는 북핵 문제, 중국·일본의 무력 증강 등 긴박한 국내외 현안들을 제쳐둔 채 오로지 상대편 흠집 내기에만 골몰하는 졸렬하고 비생산적인 막장 정치를 언제까지 이어 가려는가.

 정당마다 경쟁하듯 여성 대변인을 내세우는 뜻은 부드럽고 품위 있는 논평으로 국민에게 따뜻한 감동을 안겨주려는 것일 텐데, 여야 가릴 것 없이 여성 대변인들의 언사(言辭)가 과연 그처럼 감동적이었던가. 떼쓰고 억지 부리고 생트집 잡는 짓거리야 숱한 남성 정치꾼에게서 지겹도록 보아온 터인데, 여성마저 그 못난 남자들을 닮아가서는 안 될 일이다.

 정의의 신 디케는 여신(女神)이다. 정의가 여성처럼 여리고 연약하다는 뜻이라면 우울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공정하다는 뜻이라면 희망적이다. 정의의 법은 물의 흐름(<6C35>+去)처럼 평형 상태를 지향한다. 낮은 곳, 빈자리를 찾아가 고르게 채워주는 물길은 그늘진 소외계층을 향한 연민, 곧 사랑을 뜻한다. 법과 정의의 신이 왜 꼭 여신이어야 하는지 알 만하다.

 남성은 문명의 시장을, 여성은 문화의 삶터를 동경한다. 남자들이 전쟁의 무기를 만들어 핏빛 어린 싸움터를 내달리는 동안 여성들은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꽃과 열매를 가꾸며 생명을 보듬어 안았다. 남자들이 온갖 장(長) 자리를 놓고 추잡한 경쟁을 벌일 때 여자들은 가정과 가족을 돌보며 소망의 내일을 경작했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21세기를 감성(Feeling)·가상(Fiction)·여성(Female)이라는 3F의 여성 시대로 진단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하고 여성 최고경영자, 여성 전문가의 자리가 점점 늘어나는 우리 사회도 이미 포근한 여성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성 시대의 의미를 다만 감성의 차원에서만 찾을 일은 아니다. 여성은 직관(直觀)에 뛰어나다. 고양된 여성성(女性性)은 감성의 오솔길을 지나 생명력 넘치는 직관의 대지로 나아간다. 배려와 헌신, 돌봄과 보살핌, 그 숭고한 모성(母性)의 품으로.

 여성학자 로즈마리 통(R. Tong)은 여성성의 본질을 포용성·개방성·관계성·윤리성으로 파악했다. 지역 분열과 계층 갈등을 해소하겠다는 국민대통합의 공약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특정 지역에 편중된 공직 인사가 거듭되는 현실은 포용성·개방성이라는 여성 시대의 가치를 흐리게 할 뿐 아니라, 평균재산이 50억원을 넘는다는 청와대 신임 비서진의 유복한 환경도 나날이 삶에 쪼들리는 서민들과 소통해야 할 관계성·윤리성의 방향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구약성서의 천지창조는 무생물에서 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남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단계적 과정을 나타낸다. 맨 나중에 창조된 이브가 아담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암시가 아닐까.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신은 아마도 이브에게는 비밀스러운 사랑의 숨결을 따로 불어넣으신 모양이다. 그래서인가, 괴테는 ‘영원한 여성성’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아들딸 낳아 기르며 묵묵히 삶의 터전을 가꿔온 우리네 할머니·어머니의 자리야말로 개인과 가정의 삶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의 바탕을 이루는 생명과 사랑의 원천임에 틀림없다. 분노와 증오로 얼룩진 권력의 세계를 끊임없이 꾸짖고 타이르며 화합의 자리로 이끄는 소통의 길잡이는 남성보다 여성이 제격이다.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를 쥐락펴락하는 맹렬 여성들에게 모질고 야멸찬 결기 대신 따뜻한 소통의 손길을 기대하는 것은 정녕 허망한 바람일까. 남자들이 지니지 못한 그 부드러운 평화의 목소리를…. 여성 시대의 한 귀퉁이에서 웅얼거리는 꿈같은 넋두리라고 비웃는다면 더 할 말은 없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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