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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 신앙인답게 사는 게 왜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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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lby00523] 쪽지 캡슐

2017-02-21 ㅣ No.212167

오늘보다는 내일을 운영자 (16.10.13 06:25) | http://cafe.daum.net/ahnchangyul

신앙인답게 사는 게 왜 어려울까

 

<수암(守岩) 문윤홍·칼럼니스트/논설위원·moon4758@naver.com>

 

☞ '요한 복음 17장은 모든 사제의 공통된 기도'입니다.

(http://cafe.daum.net/lby00523/9LvK/571)

 

거대한 인간 사회를 이뤄낸 원동력은 종교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아이들은 엄마의 말을 잘 듣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착한 일을 찾으려 든다.

 

그래야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이라면 이런 경향이 분명히 있다. 산타의 ‘약발’이 오래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즈음 산타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초자연적인 감시자’이다.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며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아 어디선가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혈연을 바탕으로 소규모 집단을 이루며 살았던 인간이 어떻게 거대한 사회를 발달시켰는가, 이런 변화·발전을 가능케 한 구심점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종교적 관점에서 풀어나갈 때 아이들에 대한 산타의 존재가 힌트가 된다.

 

즉,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생각은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가게 되어 사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새로 나온 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아라 노렌자얀 지음/홍지수 옮김)는 사회화의 기원을 종교적 관점에서 답을 제시한다.

 

신앙의 대상인 종교가 인간의 사회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거대한 집단과 거대한 종교의 관계에 대해 깊이 들여다본다. 거대한 신(神)의 특성은 부정행위, 거짓말, 배신과 같은 부도덕한 행위를 감시하고 통제한다.

 

거대한 신은 인간이 스스로 나쁜 짓을 멀리하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자연히 타인에 대한 신뢰와 유대관계가 성립하고 결속력이 증가해 혈연과 지연을 뛰어넘는 대규모 사회의 발전이 가능해진다.
 
이 책의 저자는 “신들을 두려워한 신앙인들은 전지적 능력이 없는 신들이나 인간의 도덕성에 무관심한 신들을 믿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구성원들과 협력하고 신뢰하고 희생을 감수한다”고 분석한다.

 

이런 논리라면 고도로 발달한 사회일수록 종교의 지배력은 강해야 한다. 하지만 서유럽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신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으면서 높은 수준의 협력과 응집력, 공공 신뢰를 보여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저자는 이런 사회가 물질적 풍요 아래 강력한 법질서와 잘 짜인 사회제도를 갖추어서 구성원 간의 협력과 신뢰를 위해 더 이상 종교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설명한다. “종교라는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에 도달한 다음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런 설명은 고등교육을 받거나,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은 사회일수록 종교 의존성이 약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다.

 

같은 맥락에서 종교의 미래도 전망한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극히 낮은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 독재정권에 시달리는 곳에서는 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거대 종교는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예측한다.
 
눈을 나라 안으로 돌려보자. 이번 20대 국회 개원을 전후해 국회에서는 종교별 신자 의원 모임이 줄을 이었다.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개신교, 천주교, 불교 신자만 꼽아도 줄잡아 240명 선에 이른다.

 

정치인뿐 아니라 공무원 사회에도 종교별 모임이 있고, 법조인 등 직업별 모임도 상당하다. 이렇게 곳곳에 신앙인 조직이 있는 나라라면 우리 사회가 정직하고, 투명하고, 서로 위하는 모습이어야 옳다.

 

러나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회는 싸움판이 되기 일쑤이고, 각종 비리 사건에도 신앙을 가진 이들의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지어 사회 고위층 인사가 검은돈을 움직이는 정거장으로 종교기관을 이용하기도 한다.
 
신앙인이 많은 나라의 자화상이 왜 이럴까. 고위층 인사들은 종교 활동에서도 알게 모르게 '특권'을 누린다. 종교 행사 때에도 앞쪽 자리를 배려 받고, 일반 신자들은 직접 만나기 힘든 종교인들과 '독대(獨對)'할 기회도 상대적으로 많다.

 

종교인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 사회 고위층 인사를 따로 만나는 것은 이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고위층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종교인들은 각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처신과 언행을 권할 것이다. 국가 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도 주문할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왜 이럴까. 예배, 법회, 미사에 참가할 때 마음은 예배당, 법당, 성당을 나서는 순간 왜 모두 잊는 걸까. 종교를 방패 또는 장식품, 표(票)를 얻는 배경쯤으로 여기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공직자와 고위층에게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최소한 일반인 수준에서 볼 때에도 양심적이고, 정직하며, 공사(公私)를 구분할 줄 알았으면 하는 정도의 바람이다.
 
'답게 살겠습니다'란 이름의 운동이 있다. 지난 2014년부터 7대 종단 평신도 단체들이 국민 각자가 본분을 다하자는 취지로 벌이는 사회운동이다. 다른 분야도 활발하지는 않지만 이 운동은 특히 국회에서 맥을 못 춘다.

 

지난 19대 국회 때에도 임기 종료 직전 개신교·천주교·불교 신자 의원 20여명 남짓이 겨우 모여서 선포식을 했을 뿐이다. 혹시 당시 모임에 불참한 의원들은 '국회의원답게 살 자신이 없어서' 불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지경이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때이다. 모든 신앙인이 성직자처럼 살 수는 없다. 다만 각 종교가 강조하는 기본 덕목이라도 지키려 애쓰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많아지고, 조금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오늘보다는 내일을 

가난한 자입니다

☞가톨릭정보 자유게시판

 

☞ 교황, "교회도 거리로 나가라. 불평등과 맞서 싸워라."(루가 7장 12-17) ▶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규정 ▲ "…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서 평신도는 성직자에게 무조건 순명해야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고 틀린 생각이다 " ▲ "이렇게 생각하는 성직자는 사목직이 봉사직이라는 교리를 모르는 사람이고, 이렇게 생각하는 평신도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의무를 모르는 영구한 미성년자이다.” ▲ “원시종교에서 그들이 숭앙하는 신과 인간을 중개한다고 하는 무당이나 도사를 숭배했듯이 신자들이 성직자를 숭배해서는 안된다.” ▲ "이러한 신앙 행태를 '무당 숭배 잔재'라고까지 규정한다." ▲ 무당 : 귀신을 섬겨 굿을 하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일에 종사하는 여자. 한자로는 ‘巫堂’으로 쓴다. ▲ 숭배 : 훌륭히 여겨 우러러 공경함. ▲ 잔재 : 과거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방식의 찌꺼기 ▲ "결국 성직중심주의를 조장하는 책임의 절반은 미성숙한 신앙의식을 지닌 미성년자인 평신도에게로 돌아간다."(정하권 몬시뇰) ☞ 가톨릭대학교 백운철 신부는 ▲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누구나 늑대처럼 영악하게 살고자 하지만 교황은 골리앗과 다윗의 예를 들며 양으로 살라고 권고한다” ▲ “사제들은 성장 추구형 관리자가 아니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는 착한 목자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방문해 주심을 감사드리며 머무시는 자리마다 고운마음 피우시길 바랍니다. 지팡이 로벨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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