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171010 -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스크랩 인쇄

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10-10 ㅣ No.115317




2017
10 10 () 가해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Tuesday of the Twenty-seventh Week in Ordinary Time

요나서 3,1-10 / 갈라티아서 1,13-24
루카복음 10,38-42


 

-------------------------------------------------

 

 

1독서 (홀수 해)


▥ 요나서 3,1-10

1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Reading 1


Jon 3:1-10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Jonah a second time: 
"Set out for the great city of Nineveh, and announce to it the message that I will tell you."
So Jonah made ready and went to Nineveh, according to the LORD's bidding.
Now Nineveh was an enormously large city; it took three days to go through it.
Jonah began his journey through the city, and had gone but a single day's walk announcing, "Forty days more and Nineveh shall be destroyed," when the people of Nineveh believed God; they proclaimed a fast and all of them, great and small,  put on sackcloth.

When the news reached the king of Nineveh, he rose from his throne, laid aside his robe, covered himself with sackcloth, and sat in the ashes.
Then he had this proclaimed throughout Nineveh, by decree of the king and his nobles:
"Neither man nor beast, neither cattle nor sheep, shall taste anything; they shall not eat, nor shall they drink water. Man and beast shall be covered with sackcloth and call loudly to God; every man shall turn from his evil way and from the violence he has in hand. Who knows, God may relent and forgive, and withhold his blazing wrath, so that we shall not perish."
When God saw by their actions how they turned from their evil way, he repented of the evil that he had threatened to do to them; he did not carry it out.


 

-------------------------------------------------

 

 

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Reading 1


GAL 1:13-24

Brothers and sisters:
You heard of my former way of life in Judaism, how I persecuted the Church of God beyond measure and tried to destroy it, and progressed in Judaism beyond many of my contemporaries among my race, since I was even more a zealot for my ancestral traditions.
But when he, who from my mother
s womb had set me apart and called me through his grace, was pleased to reveal his Son to me, so that I might proclaim him to the Gentiles, I did not immediately consult flesh and blood, nor did I go up to Jerusalem to those who were Apostles before me; rather, I went into Arabia and then returned to Damascus.

Then after three years I went up to Jerusalem to confer with Cephas
and remained with him for fifteen days.
But I did not see any other of the Apostles,
only James the brother of the Lord.
(As to what I am writing to you, behold,
before God, I am not lying.)
Then I went into the regions of Syria and Cilicia.
And I was unknown personally to the churches of Judea
that are in Christ;
they only kept hearing that
the one who once was persecuting us
is now preaching the faith he once tried to destroy.

So they glorified God because of me.


 

-------------------------------------------------

 

 

복음


+ 루카복음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Gospel


Lk 10:38-42

Jesus entered a village where a woman whose name was Martha welcomed him.
She had a sister named Mary who sat beside the Lord at his feet listening to him speak.
Martha, burdened with much serving, came to him and said, "Lord, do you not care that my sister has left me by myself to do the serving? Tell her to help me."
The Lord said to her in reply, "Martha, Martha, you are anxious and worried about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and it will not be taken from her."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10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는 우리를 조금 당혹스럽게 합니다. 편한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할 시간을 가진 마리아보다 손님을 귀하게 모시려고 동분서주 애쓰는 마르타의 모습이 훨씬 더 겸손하고 훌륭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편을 들어 주시지 않고 마리아가 정말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세상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교통이 발달하고 통신도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데 우리의 걱정거리는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걱정거리는 정작 중요한 일 때문이라기보다는, 바로 우리의 관심과 욕심이 늘어나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는 욕심이 우리를 바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일을 걱정하기보다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자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침묵의 시간은 나의 내면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차분히 정리해 주고,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만나고 대화하며, 이를 통해 참된 나를 발견하고 만들어 가게 해 줍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04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모든 종교적 삶의 목표에는 ‘깨달음’이란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명(無明)한 인간이 참된 진리에 눈을 뜨는 ‘회심’의 사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고 회심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바리사이로서 교회를 박해하며 유다교의 전통을 지켰지만, 참된 진리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된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의 계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따로 뽑으셨다는 그의 고백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까지도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도 비슷했습니다. 세속적인 부와 명예에 매달리던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순간, 헛된 욕망을 버리고 완전한 가난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삶에로의 부르심을 깨닫고, 무너져 가던 교회를 청빈의 정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을 집에 모신 마르타의 분주한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있던 마리아가 찾은 참된 기쁨의 몫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평가하려던 마르타의 편견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셨을 뿐입니다. 마르타나 마리아 둘 다 주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본질이고, 이 회심은 ‘멈추어 듣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마리아가 먼저 깨달았을 뿐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06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브루노 사제 기념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르타가 없었으면 예수님 일행은 진지도 드시지 못하셨을 텐데 ……. 과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과 연결시켜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어제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비유를 통하여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면, 오늘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말씀은 첫째 계명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 곧 음식을 준비하는 데 몰두하였기에 그분의 말씀을 들을 겨를이 없었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이러한 행동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물론 마르타의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어찌 그 정성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외적인 봉사 활동은 과소평가하시고 관상이나 기도 생활을 더 높게 평가하셨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은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올바르게 모시고 섬기는 적절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요. 곧 지나치게 필요 이상의 음식을 준비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분을 제대로 대접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 말씀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관계에 국한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 함축된 뜻은 마르타가 방해 받지 않고 음식 준비를 잘할 수 있었듯이, 마리아도 방해 받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필요한 일’이란 음식을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는 마르타에게 당장 필요한 일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마르타적인 것과 마리아적인 것, 모두가 필요합니다. 활동과 봉사에 성실하다 보면 묵상과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할 수도 있기에, 두 가지가 중용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는 말씀을 마르타와 마리아의 관계를 떠나 다른 경우와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말씀을 듣고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며 그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아닐까요? 말씀을 듣는 것이 원천과 출발점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의 행위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07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시월은 ‘묵주 기도 성월’입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이 아름다운 계절의 저녁나절에 성모님과 함께 묵주 기도의 ‘장미 꽃다발’을 주님께 찬찬히 올리면, 마치 종이에 물이 배어들 듯 마음을 감싸는 평화와 위로를 느낄 것입니다.
묵주 기도는 교회의 삶에서 마치 공기와도 같습니다. 할머니들이 기도하며 끊임없이 돌리는 묵주의 마디마디가 교회를 지탱하고, 자식과 손자들의 삶이 엇나가는 것을 막아 주며, 사제와 수도자들이 비틀거리더라도 다시 일어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고 있음을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실감합니다.
또한 묵주 기도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늘 간직해야 하는 삶의 지지대이자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나가사키의 성자’라 불리는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책 『로사리오의 기도』를 보면, 그가 원자 폭탄으로 죽은 부인을 뒤늦게 발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읽을 때마다 부부의 깊은 사랑과 전쟁의 비극, 인생의 무상함 등을 떠올리게 하는 숙연한 장면이지만, 또한 묵주 기도가 한 신앙인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온통 잿더미였다. 나는 금방 발견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탈 대로 타 버리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곁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 있었다. 불에 탄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 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걸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 버려 저녁 해가 비치는 잿더미 위에 같은 모양의 까만 뼈가 여기저기 점점이 보였다.
묵주 기도는 우리의 삶을 은총으로 수놓으며 지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동반할 것입니다. 묵주를 손에 쥐고 ‘성모님과 함께’ 산책하며 기도를 올리는 것만큼 이 아름다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08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에게서 들은 얘기를 모아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들이 후회한 내용은 대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할 걸., ‘좀 더 친절하게 대할 걸., ‘그때 좀 참을 걸.’ 등입니다. 이에 비해 ‘돈을 더 많이 벌걸.,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학위를 딸 걸., ‘사업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쏟을 걸.’ 하며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일을 보고 접하며 분주하게 살다 보니 정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마르타를 비판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타 역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다만 마르타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본당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이 사회의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애쓰고, 자녀들에게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채근하며, 다른 이와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다만 그 일에 너무나 치중한 나머지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09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기념일)


율법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의 행위는 어제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오늘의 복음의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에서 드러납니다. , 하느님 사랑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르타의 봉사 활동이 의미 없는 것이라기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봉사는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에 쫓기다 보면 기도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뒷전으로 미루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길을 가고 있는데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이 특별히 유념해야 할 점입니다.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는 길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일 것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04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노래’를 아름답게 노랫말로 만든 글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만년에 베르나 산에서 예수님의 오상(五傷)을 받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눈까지 멀게 되었을 때, 오히려 내면의 눈으로 온 누리의 아름다움을 보고 태양을 찬미합니다. 성인은 육체의 눈이 멀자 오히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눈이 밝아져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어머니고 형님이며 누님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의 눈에는 온 세상 삼라만상이 생명을 적시는 물결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게 사랑의 눈길을 갖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생명과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보잘것없고 가난한 이웃이 오히려 더 소중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거나 착취하는 일, 자연을 무자비하게 개발하거나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이 이 시대에는 더욱 절실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05)


사람들은 저마다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다릅니다. 특히 자연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어떤 이는 자연을 살려야 우리도 살 수 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연을 개발해야만 인간도 살고 자연도 깨끗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게는 세상을 보는 것도 환경 보존과 자연 개발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신 바로 그 환경을 훼손시키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을 모시는 방법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는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분께 온몸을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받아들여야 실천할 수 있지요. 실천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 되니, 바로 선교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기 집에 주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온몸으로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중요하냐가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을 섬기는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 06)
(
성 브루노 사제 기념일)


바쁜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바쁜 것은 그저 ‘바쁜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빠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원 아이들조차 바쁘다는 말을 예사로 합니다. 모두가 착각입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바쁜 민족이 아닙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노래를 만든 민족입니다. 팔자걸음을 걷지 못하면 양반 자격이 없다고 했던 민족입니다. 그만큼 ‘삶의 여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는 것에 떠밀려 ‘여유’를 잃고 말았습니다. 한 번쯤 멈춰 서서 원인을 찾아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없는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주님의 뜻을 알고 이끄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야 평화가 함께합니다. 아무리 바쁘게 살고 분주하게 움직여도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쁩니다. 마르타처럼 ‘사는 일’에 너무 바쁩니다. 하지만 때로는 마리아처럼 그분의 말씀을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는지요? 성당 안에서 만은 ‘세상 걱정’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겠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07)
(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홍수처럼 쏟아지는 차량 속에서, 날만 새면 생겨나는 빌딩 속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육체가 성장하면 영혼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몸의 요구는 채우면서 영의 목마름을 외면한다면 영적 갈증은 당연합니다.
불안과 초조가 그것입니다. 때로는 허무감이요 때로는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갈증을 채우려 본능에 탐닉하고 재물에 젖어 듭니다. 세상이 폭력과 환락으로 얼룩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갈증은 여전히 남습니다. 몸의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끔은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조용히 있을 줄만 알아도 ‘갈증의 늪’은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해도 ‘영적 목마름’은 멀리 느껴집니다.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귀한 삶을 받았습니다. 조용히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때때로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 주님의 은총을 묵상해야 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09)
(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기념일)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르타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마르타는 음식 준비에 바빴습니다. 열 명이 넘는 장정들이 들이닥쳤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짜증이 난 언니는 예수님께 동생을 보내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동생 마리아를 두둔하시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오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이 점을 간파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분의 뜻을 먼저 파악하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바쁘게 살면서 업적을 남겨야 보람 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일을 만들고 움직여야 잘 사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바쁜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동분서주한들 좋은 몫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늘 바쁩니다. 마르타처럼 사는 일에 바쁘기만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마리아처럼 우리 삶 속에 와 계시는 그분의 뜻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162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