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추기경님의 대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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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동 [eundong34] 쪽지 캡슐

2001-06-07 ㅣ No.1259

 조정제님이 본 제목과 관련하여 저의 소견을 인용하신데에 대해, 몇가지 추가적인 의견을 더합니다.  우리가 싸울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잃어가는 세상임을 전제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때, 이것은 변증의 과정으로 얻어지는 결론이 아니라, 우리의 살아있고, 다양한 현실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고백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이러한 감격과 신앙의 기쁨을 갖고 있으며, 그것의 발전은 누구가에게 전파하고 싶은 거부하기 어려운 욕구가 있으며, 또한 이러한 욕구를 그리스도가 우리의 내면에서 강권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성경이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기의 고백을 전제하더라도, 타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여기에는, 종교적 맹신의 모습 또는 제멋대로의 의식의 확대가  아닌, 두가지의 상반된 건전한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며, 그외에 타종교에는 구원이 존재 할 수 없다는 근본주의적 믿음의 입장입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에는 순교라는 종교적 숭고성을 발휘하며, 기독교를 전파하는 열정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헛된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가 구주임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은 열려있다고 보는 포용적 입장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무종교나 믿으면 그만이라는 무관심적인 표현이 아니라, 다종교라는 현실의 토대위에서 말해지는 것입니다. 다종교는 머리속에 성립된 공론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고 종교의 양상입니다.

 

 아주 해괴한 논리로 까지로도 보일 수 있는 저의 개인적 의견은,  상기의 상반된 의견이 둘다 그리스도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향한 진정한 애정과 삶의 총체적인 관심으로 상기의 주장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말해질때, 실은 그 표면적 주장의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저는 전문적인 신학수업을 받은자도 아니며, 또한 기독교적 체험도 깊지 못하나, 첫째의 신앙적 입장이 실은 매우 존중되야한다는 입장을 전제하며, 두번째 주장에 유치한 변호를 하자면, 우리는 타종교에서 그리스도는 무관심하는가? 라는 다소 사변적인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더욱이, 그것이 사회의 해악성을 가진것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그러한 유익한것이 어디서 근원한것인가? 라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그것이 악 또는 이교도적 우상의 파생이라고 폄하하기에는 너무나 해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찌보면, 우리는 너무나 오지랖 넓은 의식의 확대로 타종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에 대해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말해야 된다면, 우리는 그들의 유익성이 그리스도와 무관 한 것이라고 말할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조금, 저급한 비유를 들자면, 불교가 자비를 말하면, 우리의 신실한 주장이 무자비가 되서는 안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다소, 진보적인 주장은 바로 이러한 종교간이 갖고 있는 교집합적 요소를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여, 서로 화해와 협조의 길을 갖자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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