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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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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7-11 ㅣ No.113158

 

2017년 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창세 32,23-33

그 무렵 야곱은 밤에

23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

24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26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27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30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지만, 그는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하고는, 그곳에서 야곱에게

복을 내려 주었다.
31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이라 하였다.

32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33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짐승의 엉덩이뼈에 있는

허벅지 힘줄을 먹지 않는다.

그분께서 야곱의 허벅지

힘줄이 있는 엉덩이뼈를

치셨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큰 성공을 거둔 CEO, 운동선수,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강력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긴 그럴 것입니다.

책임감 없는 운동선수는

 훈련에서 도망치겠지요.

책임감 없는 CEO는 경영에서

도망칠 것입니다.

책임감 없는 지도자들은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 남에게

떠넘기면서 회피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얻은 것들은 모두 누군가의

책임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양육하지 않았다면?

선생이 학생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가르치지 않았다면?

생산노동자들이 책임 없이

물건 생산을 대충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의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책임감이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듯이,

나의 책임감이 다른 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당시의 본당 신부님께서는

제게 본당에서 특강을 한 번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잘 못한다고,

또한 너무 어려서 경험도

전혀 없는 제가 어떻게 특강을

할 수 있느냐면서 “신부님,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하게 특강 철회를

부탁드렸습니다. 하지만

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준비해봐.”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이 책임지고

막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책임지겠다는 신부님 말씀에

힘입어서 특강을 했고,

이 첫 번째의 특강을 시작으로

 저는 이곳저곳으로 강의를 뛰는

 ‘강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두목이라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단 한 번도 악한 일을 하신 적이

없었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책임 없는 말에 얼마나 힘이

 빠지고 화가 나셨을까 싶습니다.

화가 나서 “나, 아버지께 그냥

돌아갈 거야!!”라면서 당신께

주어진 사명 이행을 거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책임감이

넘치시는 분이시기에 그런 힘 빠지고

화나는 말에도 끝까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 부으십니다.

주님의 이 책임감에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무책임한 말과 행동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에 큰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의 참 모습입니다.

삶이 기쁨이라고

생각하면서 잠들었다가,

 깨어나자 삶은 곧

책임이라는 것을 알았다.

책임을 마친 후에야

그것이 바로 기쁨이라는 걸

깨달았다.

(타고르)

강화지구 성체대회 때,

강의하는 저의 모습입니다.

"삶의 의미"

어렸을 때에는 뭐하고

 놀았을까를 생각해봅니다.

텔레비전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많은 채널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인터넷도 없었고, 소

위 게임을 할 수 있는

 오락기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쉽게 통화할 수 있는

휴대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공이나 장난감도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 수 없었습니다.

런데도 그때가 그립고

그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지금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고, 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부족하고 아쉬움이 많았던

 그 시대가 더 좋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80년 이전만 해도

젊은이들이 소비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근검적인 생활을 하고

 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체 소득이 워낙 낮았기

때문에 소비의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물질보다는 어떤 의미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물질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은 묵상이나 명상을

통해 의미를 찾는데

더 큰 기쁨을 얻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소비를 모르더라도

 사람들은 물질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매체를 통해 화려한

소비생활을 간접적이라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를

소유할 수 없으면 소외감을

느끼면서 아픔의

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예전과 같이 소비를

알 수 없는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소비에 대한

관심을 줄여가면서 대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는 생활보다 더 큰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수도생활을 하던 곳.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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