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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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봉주교님 방송 10월 04일 일요일 아침 7시 05분 KBS 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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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동 [popan] 쪽지 캡슐

2015-10-03 ㅣ No.11597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방송 : 10월 4일 (일요일) 아침 7:05~8:00, 1TV

▶ 소년 두봉, 신부의 꿈을 갖다

성녀 잔다르크로 유명한 프랑스 오를레앙,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두봉! 평범하기만 했던 이 소년의 꿈은 신부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꿈을 포기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성당 신부님의 도움, 가족들의 희생과 지원 덕분에 신학대학에 진학 할 수 있었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리지 않고 평생 남을 위해서 사는 신부의 삶, 이런 성직자의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 그는 말한다.

“희생이 아닌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과연 그의 꿈에 확신을 준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 “한국이라 더 기뻤습니다.. 이제 나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으로 발령받고 배에 오른 두봉은 그야말로 산 넘고 물을 건너 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거친 나라만 7개국, 두 달하고 보름의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힘들게 도착한 한국의 첫 인상은 처참했다. 그러나 그는 더 확고한 의지를 갖는다.

‘더는 과거의 나를 생각하지 않겠다. 이제 나는 한국인이다.’

그의 첫 부임지는 대전 대흥동 본당. 뒤퐁이라는 프랑스 이름을 버리고 두봉이라는 이름과 함께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난 그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만든다. 이 모임을 통해 농촌 출신 공장 노동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힘쓴다.

▶ 그의 발자국, 농민들의 길이 되다

한국인이 된지 10년, 두봉은 안동 교구의 탄생과 함께 주교로 임명된다. 40세의 젊은 나이에 주교가 된 그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유일한 단체인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지원한다. 가톨릭 농민회는 정부의 농업정책을 농민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때로는 비판했다. 그러던 중 1979년 5월 오원춘 사건이 발생한다. 두봉은 이때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힘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혹독했다. 감시, 도청, 그리고 추방!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농민들을 먼저 생각했던 그는 교황청을 찾아가 소리 높여 말한다.

“제가 사임하면 그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한국 농민운동의 새 길을 만든 목숨을 건 그의 투쟁, ‘농민의 대부’라는 수식어와 함께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 ‘최고의 사랑, 최고의 행복’을 실천하다

노동자, 농민들.. 평생 소외된 자들과 함께했던 두봉 주교, 그는 언제나 행복을 주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사랑과 행복은 무엇일까?
한밤 중 두봉 주교의 집을 찾아온 남자, 그리고 두봉 주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 그 일화를 통해 들어보는 참된 사랑, 행복의 의미와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행복 메시지.
성직자, 농민운동가, 강연자 그리고 친근한 이웃, 평생 우리의 곁을 지켜온 그의 한국사랑 이야기가 <TV회고록 울림>을 통해 전달된다.


 


 

10월 04일 일요일 아침 7시 05분 KBS 1TV <TV회고록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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