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이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범죄는 아이 유괴다. 박찬욱 감독이 만든 영화〈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영미(배두나 분)는 "좋은 유괴"가 있고 "나쁜 유괴"가 있다고 강변하지만, 유괴에 그런 구분은 가당치 않다. 그냥 유괴는 모두 나쁜 것이다. 유괴를 좋은 것이라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과의사를 만나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허다한 범죄 가운데 유괴가 최악이라고 평가하는 건 온당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유괴보다 백만배는 나쁜 범죄가 세상에는 수두룩하다. 예컨대 국가기관을 동원해 국민들의 의사형성을 왜곡하고 선거결과에 개입한 죄, 이를 은폐한 죄, 선거부정과 은폐를 물타기 하기 위해 국가기밀을 누설하고 국민들의 정신을 타락하게 만든 죄, 모든 사실이 명확히 밝혀졌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죄 같은 것들이다.

   
▲ 영화 공범 포스터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손가락질하고 이구동성으로 비 난하는 유괴와 달리 위에서 열거한 범죄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이 엇갈린다는 사실이다. 국민주권과 민주주의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드는 범죄행위들이, 그리고 이제는 검찰의 수사결과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고, 선거부정 및 은폐 등의 범죄행위의 실체와 전모를 이해하는게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많은 시민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유괴는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체계나 정치적으로 의탁하고 있는 진영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범죄다.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에 대해, 정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북한에 대해, 미국에 대해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느냐, 그리고 어떤 정당을 지지하고 투표 경향은 어떠한가 등의 요소들이 유괴사건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거의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또한 유괴사건을 다루는 미디어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건 보도 자체를 왜곡하거나 호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기왕 존재하는 각종 프레임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이렇다할 판단의 간섭을 받지 않는데다 미디어가 비교적 공정하게 전해주는 사실관계를 접한 사람은 유괴라는 범죄에 대해 윤리적, 사법적 단죄를 주저하지 않는다. 일견 매우 자명해 보이는 유괴라는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일치된 공분의 배경 뒤에는 이런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선거부정 및 은폐사건 등은 유괴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 사건을 접하는 사람들은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체계, 소속(?)된 진영 등의 요소에 의해 사건을 인식하고 사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데 크게 영향을 받는다. 미디어 환경의 비대칭성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권과 메인스트림의 이익에 완벽히 복무하는 거의 모든 매체들은 선거부정 및 은폐사건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보도 하거나 왜곡보도 하고 있다. 사건의 배경과 맥락과 함의를 심도 있게 보도하는 매체는 가물에 콩 나듯 있고, 기계적 중립에 머무는 매체들도 극소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선거부정 및 은폐사건은 공공에 미치는 해악이 유괴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유괴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우호적인 여론의 비호를 받고 있다.

이건 국가와 사회의 기초를 근저에서부터 흔드는 치명적 사태다. 헌법적 가치, 공공의 합의, 선악과 시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말 그대로 중단되는 엄중한 사태다. 메인스트림과 그 정치적 호민관들이 종교적 광신으로 무장한 지지자들을 규합해 언론의 엄호 하에 국가사무를 처리하는 나라를 정상국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선거부정 및 은폐사건은 특권과두동맹의 정치공작과 상징조작 앞에 헌법적 가치와 공공의 합의가 작동을 멈추고 유권자들의 윤리적 판단이 중지된 대표적 사건이다. 선거부정 및 은폐사건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간 후 대한민국에 남는 건 윤리적 파탄과 불의 뿐이다. 윤리와 정의가 실종된 나라에 미래와 희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