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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이제는 말할수있다-만주의 친일파&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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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son1148] 쪽지 캡슐

2011-03-08 ㅣ No.1436

 

2004년 3월 7일 방송자료 

 

 

 

 

대한민국사회에 끼친 만주의 영향은 바로

만주국에서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인맥이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에서 만주인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역시 군부였다.

1950년대에 이미 봉천군관학교나 만주군관학교 츨신의 만주인맥은 군의 요직을 점령하여

한때는 육군참모총장(정일권), 1군사령관(백선엽), 2군사령관(강문봉)이

동시에 만주인맥으로 채워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주국의 그림자가 우리사회에 짙게 드리운 것은

역시 5ㆍ16 군사쿠데타로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난 뒤의 일이다.

 

 

박정희… 정일권, 만주인맥의 경험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꾸밀 때 만주인맥, 특히 박정희의 동기생보다도 1년 선배인

만주군관학교 1기생들인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 등은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또 박정희와 동갑이지만 군 경력은 훨씬 빨랐던 정일권은 박정희 아래에서 오랜 기간 국무총리를 지냈고,

만주국의 고위관료 연성기관인 대동학원 출신인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국무총리로서

박정희가 죽은 뒤 감당할 수 없는 자리인 대통령을 잠시 지내다가 전두환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만주 출신들이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요직을 지냈다는 것만으로

한국사회에 드리운 만주국의 그림자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일일것이다.

 

만주국은 흔히 괴뢰국가라고 불린다. 여기에 비해 대한민국은 분명히 독립국가이다.

그러나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갖는 자율성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내면지도’(內面指導)라는 이름 아래 국정의 구석구석에 깊이 개입하며 좌지우지한

관동군 지배하의 만주국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내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삼가고 있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해온 대한민국의 역사는

분명 명실상부한 독립국의 역사는 아니었다.

 5ㆍ16 군사쿠데타 이래 한국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반공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만주국에 주둔한 관동군과 만주국군이 소련이라는 가상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면,

한국의 군부는 ‘북괴’라는 주적없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도 실은 그 뿌리가 만주국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등 일본의 이른바 개혁관료들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자신들의 이상을 펼 수 없는 일본을 떠나

만주국 실업부에 자리를 잡고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국가개조를 꿈꾸는 고급장교들과 개혁관료들의 실험실이 되었고,

이 실험실에서 입증된 경제개발계획은 일본에 남은 동료들에 의해 일본으로 수입되었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의 내용 면에서 볼 때,

군수산업에 역점을 둔 자급자족적 중화학공업화와 수출주도형 성장을 추구한 박정희 시대의 계획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조선에서 시행된 총독부의 경제개발정책이나

일본 본토에서의 경제개발계획보다는 만주국의 경제개발계획의 기본 방향을 따르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계획은 일본과의 국교 수교를 통해 일본자본의 유입으로 추진되었는데,

일본쪽에서 1965년의 국교정상화를 적극 추진한 인물이 기시 전 총리였고,

또 당시 외상으로서 이 조약에 서명한 인물이 바로 시이나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에 포진한 만주인맥의 협력과 상호 신뢰에 기반해서 추진된 것이다.

 

1961년 11월 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가 주최한 공식만찬에 특별한 손님을 초청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南雲) 장군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돌아간 박정희는

나구모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일본의 만주인맥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자,

대한민국에 만주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게 됨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의 영향과 일본의 훈육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훈육하는 병영국가, 규제국가로서의 만주국의 분위기는

유신시대 박정희 치하의 우리사회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월요일에는 국민교육헌장의 낭독으로 시작되어 재건체조로 마무리되는 애국조회,

목요일에는 사열과 분열행진으로 이어지는 교련조회, 국기에 대한 맹세, 점심시간의 혼식검사,

학교와 거리에서의 장발단속, 학생과 공무원들을 아침일찍 동원하는 조기청소,

열손가락의 지문을 꽉꽉 눌러 찍는 주민등록증(만주국에서는 국민수장(國民手帳)) 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충효이데올로기 등 우리에게 낯익은 70년대의 학교와 사회생활에서의 규제분위기는

40여년 전 만주국의 사회분위기를 빼다놓은 것이다.

 

필자를 포함하여 이 땅의 3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박정희 시대의 제도교육과 병영 생활에 의해 훈육된 사람들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이 민주화되었지만,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을 반대해 싸워온 사람들 안에도 박정희 시대의 잔재는 의연히 남아 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지문날인 강요를 욕하면서도

대부분의 인권운동가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는 지지난해의 주민등록증 갱신에서

별로 거리낌없이 열손가락 지문을 꽉 눌러 찍었다.

중·고등학교와 병영의 분위기는 70년대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물론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친 요인이 만주국의 영향만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이 한국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

큰형님 미국의 의사가 관철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

부모의 나라 일본의 훈육을 받는 만주국의 그림자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홍구 (성공회대학 교수)의 강연 " 한국에 드리워진 만주국의 그림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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