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수원교구 양근 성지의 물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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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무 [cheonhabubu] 쪽지 캡슐

2008-11-13 ㅣ No.537

http://blog.chosun.com/cheonhabubu/348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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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 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173-2(031-775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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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서둘렀다.

미리 자료를 챙기지 못하고 가는 곳은 답답하다.

정확한 주소가 있으니 일단은 찾아가기로 한다.

양평에서 해장국을 먹던 생각으로 우선 양평시내에서 문을 연 식당을 찾아

 선지국을 한 그릇씩 먹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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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입구에 표지판이 나타났다. 깔끔한 성당, 우뚝 선 십자고상이 퍽 인상적이다.

 지금 조성 중인 마당에 서 있는 팻말부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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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이란 지명은 고구려 시대에 근거를 둔 지명이다.

양근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어원으로,

짐작컨대 남한강이 옆으로 끼고 돌아있으면서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홍수 피해에 대비하기 위한 둑의 기능으로 버드나무를 심어

경관도 살리고 토사의 유실을 막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양제근기(楊諸根基), 튼튼한 근원, 기초란 말이 나왔다

이것은 양근 성지가 한국 교회의 근본, 요람이란 말과도 일맥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양평이란 지명은 양근군으로 전입한 지평군의 평자와 양근군의 양자가 합해진 지명이다.

양근 성지는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고

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 혹은 한강개라 하는 곳에 살고 있는

권철신에게 세례를 베풀고, 천주교 신앙생활(아침 저녁기도)을 실천한 곳이다.

그리고 양근 성지로부터 충청도(이존창)와 전라도(유항검)로 전파되었고,

당시 천주교 교리의 완전한 이해가 없었던 창립주역들이

신부의 역할(가성직제도, 모방 성직제도)을 하며

미사와 견진성사를 1년간 집전하던 곳이다.

 그래서 양근 성지를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라 부른다.


한편 이곳은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 베드로, 권데레사 동정부부와 20여명의 순교자들이 태어나거나,

신앙을 증거하다 체포되어 순교한 곳이다.

래서 양근 성지를 순교 선조들의 영원한 고향이라 부른다.

현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는

양근 성지와 관련 있는 순교자 조용삼 베드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조숙, 권데레사 동정부부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하루빨리 시복시성되어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상은 성지 안내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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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 권씨 집안의 제자 이존창은 고향인 '여사울'(餘村, 현 충남 예산군 신종면 신암리)에서,

 류항검은  '초남이'(草南, 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서 각각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이존창은 내포(內浦)의 사도로, 류항검은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강개 마을에서 비롯된 천주교 신앙이 수표교와 명례방에 이어

여사울과 초남이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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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오(尹有五, 야고보,?~1801)와 그들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點惠, 아가타, ?~1801-신자교육),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1801-성물보급) 자매 등이 순교한 곳으로 순교 때의 이야기들은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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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 권데레사(권일신의 딸)동정 부부는 1819년 5월 21일 참수로 순교했는데,

권 데레사의 머리를 찾아다가 성녀 조증이 발바라의 집 대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그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달레(한국천주교회사 저자)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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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한 뒤,

성체조배라도 할까하고 성당 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아, 경비장치가 되어있는 걸 몰랐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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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손을 댄 순간, 시끄러운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월요일, 신부님도 쉬시는 날이라 사제관은 비어 있을 테고

곧 경비회사에서 달려 올 것이다.

우리는 경비회사 직원이 오기 전에 옆길을 돌아 강으로 나가는 길을 걸었다.

십자가의 길, 십사처의 조각이 성지의 높은 벽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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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내 맘 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 순교자들의 깊은 상처도 내 마음에 새겨 주소서.

그들은 너무나 처참하게 매 맞고 목이 잘리고 이 강에 버려졌습니다.

하루빨리 시복시성 되게 해 주셔요.‘

깊은, 그리고 간절한 기도가 저절로 입으로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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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오리들이 놀라 후두둑 날아가는 곳,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막 떠오른 햇살에 강은 은빛으로 반짝인다.

건너편이  처형지였는지 그곳에 마리아 상 같은 성물들을 세워 두었다.

그 성물들이 강물에 그림자로 빠져 들어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낸다.

강물로 빠져든 아름다운 버드나무의 가지, 뿌리들....

천국이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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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은 자신의 죽음터를 이렇게 천국으로 만들고 있었다.

눈물겹도록 가슴이 벅차올라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한동안 강을 바라보며 그곳에 펼쳐지는 경치들을 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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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진작 성지를 찾아다닐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무슨 고고한 신앙심에서가 아니고, 그냥 단순한 경치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성지들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게다가 성지에 서 있는 팻말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상식을 채워 가고 있다.

그러나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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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깊은 산골짝, 

 후미진 언덕, 사람의 눈길을 피해 숨어든 자연의 동굴...

당시의 교우촌은 모두가 다 빼어난 경치를 내세울만한 곳이다.

신앙의 자유가 너무 많이 주어져 우리나라 밤하늘에서 바라보면 붉은 십자가만 다 보인다는

이 자유의 시대에 조용히 침묵 중에 묵상할 만한 곳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성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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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오리들의 작은 놀람은 조용히 기도하는 우리 곁을 지나며 이제 자유롭다.

아마도 해치지 않을 사람들인 줄 그들도 아나보다.

배가 한 지나가며 작은 물결을 일렁이게 한다.

서서히 동그라미를 그리며 다가오는 물결,

반짝이는 은물결이 마치 순교자들이 손을 내미는 것 같다.


가슴이 확 뚫리며 기도가 저절로 우러나왔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게 이런 좋은 것을 다 주시다니요.

부족한 모든 것 다 참아낼게요.

이 아름다운 걸 느끼게 되는 것만도 무한한 축복이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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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으로 올라오니 경비회사 직원이 차를 대놓고 문을 이리저리 탐색하고 있다.

“범인은 우리들입니다. 성지순례를 왔어요.”

그는 안심하고 밖으로 나온다.

“아저씨, 우리 성당에 잠깐만 들어가게 해 주실래요?”

“마음은 잘 아는데, 우리 권한 밖의 일이군요. 미안합니다.”

그는 단호했다.

성체조배는 못했어도 양근, 적어도 뿌리는 조금 다지고 오지 않았겠나,

마음 든든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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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1년 신유(辛酉) 박해 때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첫견진자 주문모신부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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