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두 정거장만 앉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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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경 [ppebble] 쪽지 캡슐

2002-12-03 ㅣ No.7755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그날도 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역에 몰려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에, 사람에 부대끼며 지낸 터라 언뜻 봐도 모두들 몹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오늘은 정말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어. 오늘따라 웬 고객들 전화가 그렇게 많이 오는지….

지금도 목이 너무 아파. 아무래도 약을 먹어야 할까봐.”

“오늘 거래처에서 약속을 제대로 안 지켜서 과장님이 화가 잔뜩 나신 거야.

어휴, 과장님 눈치 보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거 아니?”

회사 동료와 수다를 떨며, 저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오늘 하루 울고, 웃었던 일들을 토해내느라 지하철 역은 순식간에 장터가 되어버렸죠.

사람들이 저마다 내뱉은 각양각색의 웃음과 한숨들이 조금씩 모아지는 동안 저쪽에서

지하철이 불을 번쩍이며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빨리 타서 내 자리까지 맡아 줘. 알았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앉을 수 있을까?”

자리를 맡아 달라고 동료에게 부탁하는 나처럼, 모두들 지친 몸을 잠시나마 쉬게 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서서히 멈추기 시작하는 지하철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문이 열리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다보니,

곳곳에서는 작은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짜증과 투정이 섞여 지하철은 한 때

금세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지하철의 문이 닫히고, 서서히 다음 역을 향해

출발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요즘 애들은 다들 그러니? 어째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을 도대체 안 해.”

아주 카랑카랑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의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려 오는 것이었어요.

모두들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난 듯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죠.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내 얘기 좀 들어 보란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요즘 어찌된 일인지 허리가 예전 같이 않아. 오래 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에구구….”

아주머니는 두 손으로 연신 허리를 두드리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푸른색 교복을 입은

남자 아이의 눈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조금은 지나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나 같으면 주위의 시선이 민망해서라도

벌떡 일어났을 겁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입술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머, 쟤 좀 봐. 대단하네….”

동료와 저는 그 남자 아이의 대담함에 경의에 찬 눈길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얼마 쯤 지났을까.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갑자기 그 남자 아이가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이 그 아이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봅니다.

“저… 아주머니… 저기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고마워.”

“그게 아니구요. 저… 이 지하철이 두 정거장을 지날 때까지만 앉아 주세요.”

남자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쟤, 왜 저러니?”

저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동료에게 속삭였습니다.

그 아이가 내어 준 자리에 서둘러 앉으려던 아주머니도 두 정거장을 지날 때까지만

앉아 달라는 그 아이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뭐… 뭐라구? 두 정거장?”

“예….”

힘 없이 고개를 떨구며 말하는 남자 아이의 말에 아주머니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보란듯이 자리에 털썩 앉았습니다.

이윽고 지하철이 그때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정거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숨을 죽이며 남자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쫓았습니다.

지하철이 정차하면서 문이 열리자, 남자 아이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더니,

“여기에요! 빨리요, 빨리. 곧 출발해요!”

하고는 누군가를 향해 목청껏 소리치는 것입니다.

문이 닫히면서 남자 아이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사람은 한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이미 다 닳아 꽃무늬가 일그러진 블라우스에다 짙은 남색 고쟁이를 입은 여인이었습니다.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그동안 그녀가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고,

이미 다 풀려져 대충 고무질로 질끈 묶은 파마 머리는 고단한 일상을 엿보게 했습니다.

“저, 아주머니… 아주머니….”

“어…. ?”

자리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던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남자 아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두 정거장이 지났습니다. 자리를 내어주십시오.”

“내참, 별일을 다 보겠구먼. 이 자리 학생이 전세냈어? 여기 학생 자리라고 이름이라도 써 놨냐구!”

“죄송합니다. 실은 이 분은 저의 어머니신데요, 지금이 아니면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어요.

제 아버지는 얼마 전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지금은 병원에 계세요.

그래서 어머니가 집안의 모든 일을 하시고 계시죠.

아침에는 시장에 나가 텃 밭에서 기른 나물을 파시고, 저녁에는 구슬을 꿰는 일을 하시고….

하루 동안 저의 어머니가 일을 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지하철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그 자리를 미리 맡아 두었던 거예요.

아주머니, 저의 어머니가 단 몇 분만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자리를 내주시지 않겠어요?”

 

 

- 낮은울타리 매거진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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