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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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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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7-04-14 ㅣ No.111456

요한 18,1-19,42(성 금요일)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인간의 역사와 보이는 역사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처럼, 보이는 역사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우리는 흔히 신비라고 부릅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 악이나 죽음 등은 심각한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 혼란과 비참함은 우리의 존재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부당한 처사나 불의의 사고나 재난 등은 참으로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고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요,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하여 할 때입니다.

 

은수자 히에라르쿠스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밤새도록 끔직한 아픔과 유혹에 시달리다 못해,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제발 저를 도와주소서.”

 

그러자 내면에서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미 네 안에 들어와 있다. 지금 나는 네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느니라.”

 

그는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습니다.“하오나 만일 주님께서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계신다면, 제 가슴이 여전히 이토록 쓰리고 아려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네가 잊고 있구나. 내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어져 있느니라.”(앤드류 마리아,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

 

 

 

그렇습니다. 우리네 가슴이 그토록 쓰리고 아림은 바로 그분께서 우리네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가시관을 쓰신 채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가시관이 우리네 가슴을 찌르기 때문입니다.당신 사랑의 상처에서 젖을 먹이시느라고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당신 사랑의 거처로 삼으시듯,우리 마음 안에 당신을 묻으시고, 당신 사랑을 건네주시기 때문입니다.십자가가 사랑을 심는 장소요, 사랑을 선사하는 장소인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위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를,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우리의 말문을 막는,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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