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 (월)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진보’가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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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3-11-08 ㅣ No.670

대한민국 진보(進步)가 국민의 지지를 잃으면서 존재감을 상실해 가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가 아니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조 진보라고 자처했던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선동 및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찬양 등의 혐의로 구속된 후폭풍 때문이다. 이석기 사태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냉정하고 단호하다. 한 언론 매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 정도(71.8%)가 이 의원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한 것에 대해 ‘잘한 일’이라고 응답했다. 통진당을 ‘해산해야 한다’는 답변도 61.7%나 나왔다.

그렇다면 통진당을 해산시키고 이석기를 국회에서 제명하면 진보는 거듭날 수 있을까. 현 시점에서 이에 대한 대답은 회의적이다. 진보가 처한 위기의 원인이 상당히 복잡하고 다차원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지방자치 선거 직후 한국선거학회가 실시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보수(保守)보다 진보를 더 좋아했다. 평소 진보와 보수에 대해 갖고 있는 느낌이나 감정을 아주 나쁘면 0점, 보통 5점, 아주 좋으면 10점으로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진보는 5.38점, 보수는 4.74점을 받았다.

그런데 똑같은 기관에서 2012년 대선 직후 실시한 조사에서는 대한민국 진보를 대표한다는 통진당에 대해 국민은 완전히 등을 돌렸다. 통진당과 이정희 대표를 ‘싫어한다’는 비율은 각각 71.9%와 71.5%인 반면, ‘좋아한다’는 비율은 각각 5.5%와 9.2%에 불과했다. 2012년 총선 직후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 경선 의혹이 불거지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을 발사할 때도 통진당이 북한을 직접 비판하지 않는 친북 행태가 적나라하게 노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진보 비극의 시작은 합리적이고 건강한 진보 세력들이 종북(從北) 가짜 진보에 질질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진보신당은 종북 세력의 위험성을 알고도 통진당의 정치적 동원력이 필요해 선거에서 그들과 연대하고 통합했다. 이런 무분별한 연대와 통합은 결국 진보의 퇴보로 이어졌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반 국민의 이념 지형 변화다. 이명박정부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진보 30%, 중도 40%, 보수 30%’의 이념 지형을 갖고 있었다. 최근 ‘진보 25%, 중도 35%, 보수 40%’의 보수 우위 체제로 개편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의 미래’라는 책에서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 간다. 결국 시민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진보가 쇠퇴한 것은 한마디로 국민의 생각과 맞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다. 이석기 사태는 진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진보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놓고 보수와 경쟁하는 정치 세력으로 재편돼야 한다. 낡은 진보에서 탈피해 건강하고 합리적이며 책임 있는 진보로 거듭나야 한다.

그 핵심에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존중하면서 생활 속에서 진보 가치를 묵묵히 실천하는 ‘민주·민생 진보’가 ‘종북 가짜 진보’를 스스로 척결하는 것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종북 세력이 대한민국 땅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도 살고, 진보도 사는 길이 열릴 것이다. 또한 ‘진보=종북 좌파’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진보는 앞장서서 북한 체제의 변혁을 강도 높게 요구해야 한다.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압박하며, 북한을 향해 어떤 경우에도 대남 도발을 용인할 수 없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피력해야 한다.

최근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새누리당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부정하고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면서 틈만 나면 종북몰이, 매카시즘에 기대기에 여념이 없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런데 이 발언은 시점과 내용 면에서 적절하지 못했다. 여야 정치권이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몰아가면서 극한 투쟁을 하게 되면 종북 세력은 반드시 그 빈틈을 노리며 그들에게 동조하는 세력을 규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북 척결과 통진당 해체가 진보의 몰락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진보가 없는 세상은 보수가 없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김형준/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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