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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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法府 신뢰와 국가 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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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3-11-08 ㅣ No.669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이 영국 국빈 방문길에 오를 때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동양에서 여성 대통령을 최초로 탄생시키고 놀랄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룩한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다. 한때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보도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들 뿐 아니라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는 아직도 성숙한 단계에 와 있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지난 대선 이후 10개월이 넘도록 과거 족쇄에 묶여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한 반면,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정보의 비밀 유출 및 조작·파기 그리고 법의 일부에 속하는 항명 등을 예로 들면서 “민주주의 과잉을 걱정하는 국민이 많은 상황”이라고 반박했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실험한 정치 제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제도임이 증명됐지만, 흠결 없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영국의 독설가인 극작가 버나드 쇼가 “데모크라시란 것은, 부패한 소수자의 결정에 의해 만들어진 선거로 끌어들여진 무능한 다수의 결정”이라고 한 것은 민주주의가 결코 완전하지 못하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민주주의에 대한 버나드 쇼의 이러한 비판은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독배(毒盃)를 들고 죽게 한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한 중우정치(衆愚政治)의 피해를 지적하는 문제와 그 맥을 같이한다.

최근 이집트의 정치적 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우정치와 함께하는 광포한 자유는 민주주의의 가장 무서운 적(敵)이다. 자유에 결코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유가 유익하게 작용하기 위해서는 자제(自制)를 위한 법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약을 마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현 단계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은, ‘광포한 자유를 자제하게 해서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사법부(司法府)의 질서와 권위가 무너지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당은 작금의 검찰을 두고 ‘정치검찰’이라고 하지만, 그들 또한 검찰 일부와 보이지 않는 장막 속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국민참여재판 역시 국민이 수긍하기 어려운 평결을 내려 국민을 불안케 하고 있다. 전주지방법원 배심원단은 “박근혜 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을 훔쳤다”는 허위 사실을 자신의 트위터에 여러 차례 올린 안도현 시인에게 터무니없는 무죄 평결을 내려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다. “노벨상을 받을 세계적인 시인 안도현”(문재인 의원)에게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나, 잘못을 저지른 행위에 대해 재판부가 마침내 일부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재판이 이념이나 정치적 이해, 또는 감성적인 편견에 지배돼 사회적인 통념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면 사법부의 신뢰를 잃게 만들 뿐 아니라, 민주주의 헌법에 기초한 국가 기강을 흔들게 될 것이다.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은 “법은 사회 관습과 사상의 결정체이며… 그 법은 모든 피통치자의 동의에 근거를 두고 있고 인류의 조직화된 여론이 뒷받침돼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엘버트 허버드 역시 “여론을 구현하지 못한 법은 절대로 집행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론은 결코 일시적으로 분출된 분노가 아니라 오랜 시간 보이지 않게 쌓여서 형성된 이성적인 사회심리가 객관화된 현실이다.

수사는 물론 재판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국민이 모르는 바 아니다. 그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국민은 판·검사들을 존경하고 사회적인 신뢰를 보낸다. 만일 검사로서, 또는 판사로서 주어진 사명을 지혜롭게 다하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은 법복을 벗어야 한다. 효봉 스님이 자신의 잘못된 재판의 결과로 살인을 초래했다고 참회하며 불가(佛家)에 귀의해 입적(入寂)한 일은 재판에 임하는 젊은 판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판이나 권력에 눈을 파는 법관이나 검찰 때문에 작금과 같은 소란이 계속 일어난다면 이 땅에서 성숙한 민주주의는 기대할 수 없고 ‘쓰레기통에서 피는 장미’에 대한 비유적인 얘기를 또 듣게 될 것이다.

- 이태동/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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