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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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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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6-12 ㅣ No.3714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제 딸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딸자랑을 한참 늘어 놓은 자매님은 자리를 뜨면서 수녀님께 부탁을 했다. 과년한 딸이 일류대학에 들어간 이야기, 유명 대학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공부 더 잘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후였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한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몇 달 전 여의도 성당에서 평신도 강론을 하고 나오는데 한 형제가 온몸으로 나를 꽉 껴안았다.

그는 내게 사과할 일이 있다며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변론했던 사건의 담당판사였다.  

늘 누군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길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그를 볼때마다 나는 숨이 막혔다.

그에겐 음악도, 사랑도 없을 것 같았고 고압적인 모습을 보면 그냥 주먹이라도 한 대 날려 주고 싶었다.

아니 판사라는 직위를 호주머니에 넣은 종이처럼 만지작거리며 자유롭게 살지 왜 그 직위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끙끙거리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나 나를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날 평소처럼 재판을 진행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는데 변호사인 내가 반박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판사로 지내던 10여 년 간 변호사가 판사의 의견이 틀렸다며 법정에서 반박한 것은 처음이어서 재판이 끝나고 그 문제를 검토했더니 자기가 틀렸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자신의 견해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반박해주어 처음으로 자신의 재판 진행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며 자신이 그간 겪은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부장판사가 되니 아내는 판사보다 돈 많이 버는 변호사가 낫다며 개업을 권유했다.

걱정이 앞섰지만 부장판사라는 경력이 있으니 전관예우를 믿는 의뢰자가 있을거라는 기대를 갖고 사건을 물어 오는 브로커 3명이나 고용해 개업을 했다. 과연 전관예우를 기대 하는 의뢰인들이 브로커를 통해 찾아왔고 사무실은 번창하는 듯했다.

열심히 교도소로, 법정으로 뛰어다니며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사건을 가져온 브로커들에게 소개비와 급료를 주고 임대료며 각종 세금을 내고 나니 그의 손에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돈을 벌겠다고 정말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는 전혀 엉뚱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나 폐업을 해야겠다고 아내에게 상의했더니 무능한 사람이라며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  

 

폐업 후 실패자가 갈 곳은 성당뿐이었다.

성당에 나오면 마음이 편안했다.

희망도 생겼다.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지 정도를 걷겠다며 맑은 미소를 지었다.  

실업자가 됐지만 그느 이미 판사 시절의 그 답답하고 소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과도 할 줄 알고 자신도 낮출 줄도 아는 거인으로 변해 있었다.  

 

주위에는 의외로 초일류 학력의 문제어른이 많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일류대학 교수로 계시는 어느 유명한 어른은 만날 때마다 하버드와 미국 타령이다. 그분에게서 그 단어들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할 정도로 무미 건조한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는 스승의 날에도 찾아오는 제자도, 조교도 없다.

그는 하버드와 일류대학 교수라는 짐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오늘도 쓸쓸히 연구실을 지키고 있다.

신문에 쓴글이 연구실 곳곳에 붙어 있지만 무엇을 위해 유명한지 궁금할 때가 많다.

사회문제를 논의하면 그럴 듯한 단어들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새로운 게 없다. 신문에서 늘 보던 내용아니면 교과서에서 읽은 것들이다.

 

성서까지도 마음으로 읽으려 하지 않고 서양 역사나 전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덤비는 분이다.

안타까워 성당에 나가자고 권하면 가톨릭이 어떻고 불교가 어떻고 그가 아는 지식으로 강의를 늘어놓는다.

그를 밝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종교밖에 없겠다 싶어 수 차례 가톨릭을 권유했지만 늘 성서공부를 해보겠다는 대답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던 그가 민사소송에 연루됐고 담당판사를 아느냐며 나를 찾아왔다.

실제로 판사와의 친소관계가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데도 그다운 판단을 내린 것이다.

헛일이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내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담당판사의 여동생이 수녀님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기회에 가톨릭을 접하게 하는 것도 그에게는 커다란 은총이다 싶어 그 수녀님이 가르치시는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하라고 했다.

 

그러면 그 수녀님을 통해 당신 사정도 얘기해볼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는 반색을 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성당에 등록하러 가는데 짓궂으신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그분이 어떤 죄인도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그릇에 맞게 부르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과연 많이 배운 사람들은 무얼 배운 것일까.

그런데도 부모들은 과년한 자녀들이 직장도 없이 결혼도 하지 않고 계속 공부하는 것을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자녀들도 남이 만들어 놓은, 이미 한물간 지식만 쌓아갈 뿐 자신의 힘으로 창의적인 삶을 만들어 가는데는 무관심하다.

최소한 대학 졸업 후에는 잠자고 있는 지식을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기회를 가져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후에 지식을 더 쌓아야 할 필요성이 생겨 공부한다면 그거야말로 산지식이 되지 않겠는가.

 

착한 미소를 잃지 않는 딸,

남을 위해 배려할 줄 아는 아들,

이런 참지혜를 습득한 자녀들을 믿음직스러위하는 부모의 모습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내로라하는 대학에서 계속 공부만하는 것이 자녀들의 참행복이 아닐진대 우리 부모님들은 왜 자녀들의 헛된 허영심에 기름을 붓고 그들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는 걸까.

 

"내 딸이 성숙한 인생을 살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부탁하는 부모들을 만나고 싶다.

 

                              윤 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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