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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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렬신부(참된 魚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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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12-02 ㅣ No.116566

 


참된 魚夫

†찬미예수님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맞추시면 상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성당과 교회의 차이점이 뭘까요?

우리 흔히들 교회하면

개신교회를 자꾸 생각하는데

천주교회도 敎會라고 불러요.

그렇다면

성당과 교회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결정적인 힌트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애초에

성당을 세우셨습니까?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예?

(성당 왁자지껄~~)

예수님이 처음부터

이런 성당건물을 만드셨어요?
아니죠.

성당은 뭐냐?

다만 눈에 보이는 건물이예요.

교회는 뭐냐?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공동체예요.

이 성당 보수를 잘 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까?

백년? 

서양에 있는 성전들은

 돌로 지었기 때문에 오백년,

육백년짜리도 있긴 하지만

이 성당도 언젠가 수명이

다 되어서 허물어지겠죠?
성당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집이예요.

그러나 교회는

허물어지는 집이 아니지요~~

비록 예수님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어도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건 교회예요.

예수님이 안 계시면

교회가 아니죠.

말씀이 안계시면

교회가 아닙니다

. 요즘 성당은 많은데

교회가 없는

천주교가 많아요.

성당은 50억,

60억짜리로

엄청나게 지어놨는데,

그 안에 예수님이

안계십니다.

성모님도 안계십니다.

말씀도 없습니다.

그것은 성당일 뿐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주님이 안계시고~~

말씀도 없고~~

성모님이 안 계신

그런 성당은~~

오늘 2독서에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대로

 바오로 파다/

아폴로 파다/

베드로 파다/

예수그리스도 파다/

하는 패거리들만

바글바글 대고

우글우글 대지 그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질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성당은 언젠가는

허물어집니다.

예루살렘성전도

로마 군인들의 창칼 앞에

무참하게 다 폐허가

되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성당이 아니라

교회를 만드시기 위해서

열두제자를

처음부터 선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부딪치는

제일 큰 문제가 뭐였느냐?

예수님은 이미 아셨어요.

당신이 앞으로 칠십년 팔십년

더 사실 것이 아니라

기껏 살아봐야 삼년밖에

더 못산다는 것.....

따라서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나를 대신해서 구원사업을

계속해야 할

사람들이 필요했고

메시지의 영속성,

지속성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해결책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하느님의

메시지를 써넣을 수 있는....

전파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일이 아마 제일

급선무가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시자마자

가장 먼저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은 삼년동안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도

내 뒤를 이어서

일할 사람,

열둘을 처음부터

모았던 겁니다.

한 사람을

모은 것이 아니지요?

이 열둘이라고 하는

의미가 두 가지의

큰 줄기가 있고

테마가 있습니다.

열둘로 시작했다고 하는

은 뭐냐?
첫 번째,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종교가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같은 취미생활,

무슨 동호인,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내어가지고

 만들어지는 계모임, 같은

정치적인 성향끼리 만난

사람들끼리 무슨 당이다,

무슨 당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만든 공동체.......

그러나 예수님이 만든

공동체는

그런 것을 접합체로 써서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

친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4대 기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가 전교입니다.

두 번째가 교육입니다.

세 번째가 봉사입니다.

네 번째가 친교입니다.

그런데 앞에 얘기한 전교,

교육, 봉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위해서는

공동체구성원끼리

올바른 친교가 되어야만

올바른 전교도 될 수 있고

올바른 교육도 시킬 수 있고,

올바른 봉사도 가능합니다.

친교에는 4대 친교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것을

공동 소유도 내어놓고

재산과 물질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4대 친교의 첫 번째는

물질의 친교입니다.

나누는 친교입니다.

교회 안에 나누는 친교가

없다면 건물만 있지,

그것이 교회는 아닙니다.

두 번째는 기도의 친교

필요합니다.

냉담하는 사람,

못되게 구는 사람,

죽일 놈, 이놈저놈하면서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냉담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반원들끼리 힘을 합쳐서

기도의 친교를

나눠야 됩니다.

냉담하고 있는 내 남편

 미워만 할 것이 아니라

죽을힘을 다해서 기도로써

아이들과 같이 아버지가

성당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줘야 됩니다.

세 번째,

기쁨의 친교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그랬습니다.

‘어떡하면 상대편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십시오!

그것도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애써야겠습니다.

우리들 많은 경우에

담 울타리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독히 관대합니다.

그러나 내 집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매몰차고 냉정하게

상처를 그렇게 무수히

주면서도 자신은 전혀

상처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밖에 나가서만 점잖은

사람 소리 들으면 되고

인격 있는 사람

소리 들으면 됩니다.

밖에서는 그렇게 퍽퍽

퍼주면서도

집안사람들에게는

냉냉하고 인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아내는 천국으로

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내가 쏴붙이는

말 한마디에 남편은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고  희망을

가지고 살수도 있습니다.

가정공동체든,

반공동체든 넓게는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세 번째 접착제는

바로 기쁨의 친교입니다.

네 번째,

치유의 친교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아니면

사회생활하면서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 아내,

내 가족, 우리 반원들....

서로의 상처가 아물만하면

그 사람한테 가서

손톱으로 후벼 파내서

다시 피를 흘리게

할 것이 아니라 상처는

덮어주고 허물은 감싸주면서

서로 치유의 친교를

나눠야 됩니다.

교회의 4대기능이 전교,

교육, 봉사, 치유이지만

이 4대 기능이 친교의

접착제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교도 소용없고,

교육도 소용없고,

봉사도, 치유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야말로

오늘 바오로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개탄하셨던 대로

 바오로 파다,

 아폴로 파다,

베드로 파다,

그리스도파다.....

그것이 비록 눈에 보이는

성당일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머무시고,

말씀이 계시는 교회는

절대 아닐 겁니다.

예수님이 친교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써

교회가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제자

열둘을 뽑은 첫 번째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바리사이파는

 ‘분리된 자다.’ 라는

그 뜻입니다.

‘나 만큼은 구원받는다.’

개인구원에 자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신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가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뿐입니다.

얼굴에 뭐가 묻었을 때는

거울 앞에 섭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이 네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이지....

거울이 나한테 다가와서

더러운 거 닦아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뿐입니다.

얼굴에 묻은 상처,

더러운 거 닦아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들은

율법을 지키는 그것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진다고

착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오로지 개인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체구원/ 공동체구원

애초부터..... 교회

시초부터 시작하셨던 겁니다.

두 번째, 열둘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교회는

혼합된 집단이라는 겁니다.

열두 명을 보면 어느 하나

똑똑하고 반듯한 인간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뽑혔던 어부들도

그렇고 마태오도

매국노 소리를 듣던

배교자였습니다.

로마사람들한테 빌붙어서

같은 민족, 세금 뜯어먹던

세금징수원이 바로

마태오였습니다.

그러한 매국노를 죽이려고

했던 광신적인

애국주의자들 중에

하나가 열혈당원

시몬이었습니다.

이들이 만에 하나 길에서

서로 만났다고 하면

시몬은 칼 들고 마태오를

찔러죽이고 암살하려는

그런 관계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열 둘 가운데 그 둘을

집어넣습니다.

다시 말하면 극과 극의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공동체를 이루고

불협화음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뭐냐?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중심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사이비요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만 걸어놓고

간판만 걸어놓고

예수님 없는

교회가 많습니다.

분열과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서로가 잘 났다고 하면서

수십 개의 패로 이루어져서

잘난 인간들은 지 패거리를

 늘 끌어안으려고 하고

반 교회적이 되고

反그리스도적이 되어서

사탄 앞에

휘돌림을 당합니다.

교포들 피정을

나갈 때가 많습니다.

나가서 거기 신부님들 얘기

들어보고 또 제가 느껴보면

교포들은 늘 세 군데를

 왔다 갔다 합니다.

집과 일터와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래도

유일하게 한국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또 교회와 잘 연관이 되어야만

자기  비즈니스에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많은 경우에 비즈니스

때문에 한국에서는 성당이고

예배당이고 안 다니다가도

거기에 가면 반드시

어느 한군데를 들어갑니다.

새로 온 신부님이 우리 가게를

신경을 안 써 주신다...

그러면 그 신부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 전 신부님은 우리 가게에

신자들 잘 몰고 와서

밥도 팔아주고... 그런데

새로 온 신부님은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비록

 비즈니스 때문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신자가 되었더라도

그 후에 바로 신앙을 찾아서

올바로 살면 되는데

비즈니 때문에...이권 때문에 

성당에 들어와서 끝까지

그런 인간으로 남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 없이

살기 때문에 그 교회의

악이 될 뿐입니다.

아무튼 세상 표준으로

판단한다면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들은 특별한

자격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도

아니고 특별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고

훈련받은 신학자도 아니고

신분 높은 교회인이거나

성직자도 아니었습니다.

열두 명의

보통 인간이었지만

그들이 깨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누가 있기 때문이라고요?

<예수그리스도>

반모임할 때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안 계시고

말 잘하는 반장이

예수님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 반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곡성당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성모순례지 선포를

수백 번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열둘이라고 하는 의미는

두 가지라고

얘기 드렸습니다.

첫 번째,

교회는 시초부터

똘똘한 놈 한두 놈

골라서 제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열둘이라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열둘은 4대 친교라고

하는 영적접착제에 의해서

이 세상 끝날 까지

교회는 지속될 것입니다.

열둘을 뽑은 두 번째 이유

열둘이 혼합된

짬뽕집단이었지만

깨어지지 않았던

가장 큰 힘은

 예수그리스도가 늘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도 예수님

중심이면 그 가정은

깨지지 않지만

돈이 중심이고/

쾌락이 중심이고/

세상이 중심일 때는

방마다 십자가를

걸어놓는다고 그게

성가정이 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오늘 예수님은 열 둘

운데서 네 명의

어부를 선택하십니다.

어부를 선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번

얘기 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 어부를

선택했겠습니까?

첫 번째, 어부에게는

자기 것이 없었습니다.

갈릴리호수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따라 오너라 하니까

두 쌍의 형제 어부는

‘곧’ 모든 걸

버리고 떠났습니다.

‘곧’ 이라고 하는 표현을

복음사가는

두 형제에게 다 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따를 때는 많이 가진

자일수록 하느님 따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어부는 이 세상 살면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기에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욕심이 많으면

치우기 힘들지요.

여러분들 다 치우고 사십니까?

하느님에게 돌려드릴 시간,

하느님에게 돌려드릴

영적 물적인 예물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살아가는가!

어부들에게는 애초부터

자기 것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가진 놈을

따라오라고 하면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내가 따라가기는

 따라가겠지만 지금

당장은 못 갑니다.

하지만 어부는 빈 몸뚱아리

하나만 따라

나서면 되었습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포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두 번째, 어부를 부른

이유는 어부라고 하는

직업은 협동을 해야만

그물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공동체가 삽니다.

힘세다고 해서 그물을

지 멋대로 끌어올리면

그물이 뒤집어 집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개인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가

함께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황금률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 복음 7장에

뭐가 나옵니까?

니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먼저 해 줘라!

이것이 황금률입니다.

‘저 놈이 먼저 용서 청하면

그 놈 내가 용서 해 줄 거야!’

아닙니다...먼저

사과 청하십시오.

‘니가 상대편에게 원하는

것을 먼저 니가 해라!’

공동체가 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마음으로 대해야 됩니다.

이것이 성서의 골자 중의

하나인 황금률입니다.

‘니가 하면 나도 하겠다!’

아니죠,

내가 먼저 해야 됩니다

나만이라도 해야 됩니다.

세 번째로 어부들을

부른 이유는 어부들은 항상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를 깨닫습니다.

인생의 위험과 고통을

만날 때 마다 우리는

하느님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호들갑 떨지 마십시오.

침묵 가운데서

 이 고통이...이 어려움이

무슨 뜻인가를

늘 묵상해야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다 보면

어둠 반대편에 있는 엄청난

큰 빛을 보게 될 겁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실 때는

예수님의 너무나 강한 빛

때문에 내 뒤에는

분명히 아주 강한 어둠이

드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이 깊다고 하는 얘기는

반대로 주님이 내게

가까이 계시다는

그 뜻일 겁니다.

어부들은 이 세 가지 이유,

무소유성, 공동체성,

늘 위험 가운데 고통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했던

종말론성 때문에

예수님께 쉽게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세례 받은 우리들도

 이 세 가지의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주님 앞에 갈 때

비우면서 가야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잘난 척

하지 말아라!

죽는 법을 배워라!

세 번째, 하루하루를

십자가가 올 때 마다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고 

 울고불고 난리 칠 것이

 아니라/ 걱정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부들을

부르시면서

첫 번째 명령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우리를 제자로 만드신 이유,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첫 번째 이유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교우생활 하시면서

 얼마나 사람을 낚으셨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어부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어부는 고기가 걸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사람 낚는 어부는

인내를 가져야 됩니다.

어느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9일 기도 바쳐도

꿈쩍도 안하고 성사 볼

생각도 안한다고 해서

묵주 팽개치면 안 됩니다.

2년이 되든 3년이 되든.....

끊임없이 인내를 가지고

사람 낚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급한 결과를

거두려 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참된 어부는

불굴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어부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다시 시도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느 교우분이 예비자를

 모시고 왔는데 이 예비자는

교리 배울 때마다

한 달을 못 버티고

포기를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 예비자를

다시금 모시고 옵니다.

이렇게 4년 동안

 4수를 시켰는데

이 예비자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네 번째마저도

끌고 오는 그 교우가

대단했습니다.

교리 반에 데려다놓고

많은 경우 알아서

하라고 그럽니다.

“교리반에 잘 다녀.”

교리반을 포기했을 때

다시 한 번 격려를 하면서

“우리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자.”

뭔가 이렇게 불굴의 정신이

있어야만 사람을 낚을 줄 알지....

한 번 시도했다가

시큰둥한다고 해서

‘아, 니 맘대로 해,

니 신앙 니가

알아서 하는 거지...’

사람 낚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세 번째, 어부는 고기 잡을

시기를 분별합니다.

현명한 어부는 고기를 잡을

가망이 있는 때와

없는 때를 압니다.

그물을 던질 때와

던지지 않을 때를 압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환영할 때가 있고

진리에 반감을 가질 때가

있다는 거를 압니다.

전교할 때 말을 할 때가 있고

지금은 침묵을 하면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때를

분별을 할 줄 압니다.

네 번째, 참된 어부는

고기에게 맞는 미끼를

만들 줄 압니다.

낚시질을 해 본 분은

아시겠지만

붕어가 먹는 미끼가 다르고

바다고기의  미끼가 다르듯이

고기에 따라 주는

미끼가 다릅니다.

그래서 바오로사도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가지

모양이 된 것은 여러 사람을

내가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전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이론을 통해서

때로는 꾸준한 방문을 통해서

때로는 서적이라든가

테입을 통해서

때로는 물질을 통해서

하느님께 인도해야 됩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옆에서

기도한다고

하느님 찾겠습니까?

지 먹던 쌀 가져다가

밥 해먹여야 되는 것이

바로 고기 낚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현명한 어부는

자신을 숨길 줄 알아야 됩니다.

전교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하느님이 주신

재주를 가지고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 모으면

자신은 사라져야 됩니다.

그리고 뒤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됩니다.

오랫동안 피정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의를

들으러 오고 테입을 듣습니다.

신부님 만나러 옵니다.

강의 들으러 오겠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능력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

그 다음에 사제는

겸손하게 뒤로

물러서야 됩니다.

끝까지 예수님 앞에

버텨서 주인 행세를 하면

교주가 되는 겁니다.

우리들은 오늘 주님께서

공동체로/ 4대 친교의

영적인 접착제로/

열둘로/ 교회를

시작하셨다는 것,

명심합시다.

그리고 교회 안에 수많은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에 드는..... 또는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다면

교회에 어떤 어둠의 세력이

오더라도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성령이 지켜주심을

믿도록 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8. 01. 27일  

연중 제 3주일 가르침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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