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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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한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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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cskim74] 쪽지 캡슐

2002-08-05 ㅣ No.6921

 

 지난해 성탄시기에 일터에서 늦게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나에게 "아버님, 상의드릴 말씀이 있어요."라며 마리아가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기에 " 용돈이 좀 궁한 게로구나."하였더니 그게 아니라 하였다. 착한 친구가 있어 "내년 봄에 결혼하면 어떨까요?"하고 나의 눈치를 살폈다.

 

  집안살림과 아이들 교육은 아내 몫으로 맡기고 사무실 일에만 매달렸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니었던가싶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마련하느라 대학도 아직 마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학교도 학교지만 혼수를 어떻게 장만하는가 생각하니 내게는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멍하니 말이 없으니 "돈은 걱정 아니하셔도 돼요. 결혼반지나 장만하면 성사를 볼 수 있겠지요."라고 마리아가 말을 대신했다.  

 

  그 날 저녁 돌아가신 어머님의 모습이 더욱 그리워졌다.  내가 어린 시절 어머님께서는 겨우내 물레를 돌려 무명실을 뽑아 두셨다가 이른 봄날 시골마당 양지 바른 곳에 잿불을 피워놓고 베를 맨(무명실에 풀을 입혀 솔질을 한 후 불에 말리는 과정) 뒤에, 베틀을 차리고 베를 짜며 길쌈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온 종일 베를 매다보면 끼니도 잊어야만 했기에 어린 내가 "엄마 배고파."라고 옆에서 보채면 잿불에 씨감자를 구워주시며 달래셨던 기억도 새롭다.

 

   어느 해인가 나는 베를 짜시던 어머님께 "장터에 가보니 광목이나 옥양목이 많이 나오는데 무얼 하시려고 힘드시게 베를 짜세요?"라고 여쭌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그래 이젠 길쌈도 더 이상 소용이 없구나. 그러나 이번만은 올을 곱게 잘 짜서 너 장가 갈 때 혼수로 쓰련다." 하시며 미소를 지으셨을 때 나도 싱긋 웃고 말았다. 그렇게도 정성스레 마련한 무명 한 필은 먼 훗날 처가댁에 함 파러 가는 날까지 어머님의 장롱 속에 오래오래 간직되었다.

 

   한올 한올에 어머님의 손끝이 닿아 무명 한 필에 수놓은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며  언젠가 아내에게 "무명에 미색이나 코발트색을 염색하여 여름용 이불이나 침대시트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다가 "촌스런 발상"이라며 딱지를 맞은 후로는 또다시 스무 해가 지나도록 옷장 속에 갈무리해야 했다.  이삿짐을 처가에 맡겨두고 해외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던 여름날 장모님께서 "무명을 장 속에 그냥 두면 좀이 쓸지 않겠느냐?"며 여름이불을 만들어 건네주실 때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에 젖어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체 눈시울을 붉혀야만 했었다.

 

  박봉의 공직생활에 집 한 칸 마련하느라 옆도 돌아보지 못해 어머님께서 장만하신 무명 한 필 같은 혼수는 고사하고 아이들 교육비 마련에 늘 허덕였던 내가 아닌가. 집안에 도둑이 들어도 훔쳐갈 물건이 없고, 개에게 먹일 밥이 없어 개를 기르지 않았던 황희 정승의 삶에 비하면 천양지차(天壤之差)이지만, 정승이 세상을 떠난 후 막내딸 혼수가 없어 부인이 시름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세종 임금께서 하사 하시면서 "혼수가 없어 시집을 못 가는 처녀들에게 그것을 나라에서 장만하여주도록 하라."는 어명을 내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떠올랐다.

 

  지난 5월 화창한 봄날 딸아이는 본당에서 혼인성사를 갖게 되었다. 가족모임 때 내가 평생 벗하며 읽으려고 십년 전에 사 두었던 해설이 실린 성서가 눈에 들어와 "어려울 때 벗으로 삼고 아빠 대신 늘 벗이 되어 주어라."는 글과 함께 보자기에 싸서 무명 한 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전했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받아드는 마리아의 모습을 잊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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