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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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현대사 - 영웅이 된 이방인 - 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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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5-03-28 ㅣ No.68

"아무도 그를 한국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이어야 했다"





1963년 12월, 역도산이 야쿠자의 칼에 찔려 사망했을 때,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가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일본인들에게
역도산은 패전의 쓰라림을 달래주고 자신감을 일깨워주는 당당한
'일본인'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링 위에서 거구의 서양 레슬러들을
당수로 통쾌하게 쓰러뜨리는 그는 일본인이라야 했다.





"일본사회를 믿지 않았다. 그는 혼자였다"



역도산 자신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17세에 일본에 건너온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일본의 영웅이 되고 부와 명예를 얻었어도, 그 자신
스모 선수 시절 절대로 최고 경지인 '요코즈나'에 오를 수 없었던
차별받는 한국인이란 사실 또한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을 차별하는 일본인들을, 일본사회를 그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성공만을 위해 달려간 시간들, 그 팽팽한
줄타기 속에서 서서히 그는 부서져가고 있었다. 술 마시면 의례 주위
불량배들에게 시비를 걸었고, 각성제와 수면제를 번갈아 복용하며
건강도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사회에서 최고의
'일본인'으로 성공했던 역도산, 그 아이러니 속에서 그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영원한 이방인, 타자, 재일 한국인의 삶"



1945년 일본은 패전하였고, 한반도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은 재일 한국인을 해방된 한국의 국민이 아니라 적국 일본의
국민으로 대우했다. 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자 이제는 다시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차별의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그 속에서 재일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가혹한 것이었다.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성공한 야구선수 장훈은 말한다.
"야쿠자 아니면 야구였다"라고...





"한 인간의 삶이 이 보다 큰 모순일 수
있는가?"



역도산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북한에 남아있었던 부인과 딸,
일본인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철저히 숨겨야 했던 시간들, 그 속에서
그는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 인간의 삶이 이 보다 큰 모순일
수 있을까? 역도산의 삶을 통해서 종전이후 재일 한국인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이해를 시도해 본다. 그리고 한 개인에게 국가와 민족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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