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룰은 권력을 가진 자가 정하는 거야. 공정한 게임이란 없어. 진실?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아. 정부 발표에 의심하고 자꾸 말 많으면 종북 좌빨일 뿐이야. 눈 감고 귀 막고 그냥 살아. 영화보고 섹스하고 프로스포츠에 열광하면서 그냥 살란 말이야. 48%에 속한 패배자들 주제에 걸맞게!” 대한애국총연맹 청년부장인 티켓다방 사장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정치 연극을 표방한 천안함 랩소디의 한 장면이다. 오는 17일까지 대학로 예술공간 서울에서 앙코르 공연을 한다.

언뜻 지나쳐 버릴 수 있는 대사이지만, 가슴을 후벼 파는 힘으로 다가온다. 유신시절 유행했던 구호가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다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인터넷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개 짖는 소리가 아닌 엄포나 협박으로 들린다. ‘애국 청년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박근혜 정부 권력 핵심부의 합창소리처럼 들린다. 여기에 유신좀비들까지 가세해 한국사회를 휘감는 주술이 되었다. 연극 제목의 랩소디처럼 국민을 미치게 만드는 광시곡(狂詩曲)’이다.

천안함 랩소디의 무대는 버려진 공사판처럼 어지러운 고물상이다. 고물상 주인 박달(명계남)은 조수인 조카 억수(조영길), 티켓 다방 아가씨 연자(윤국희)와 함께 천안함 침몰 의혹에 대해 얘기한다. 이때 수구 꼴통을 자처하는 다방 사장(홍승오)가 등장해 이들의 만담수준에 불과한 천안함 의혹에 '종북 좌빨' 딱지를 붙이고 입을 다물라고 협박한다. 그는 정부가 종지부 찍은 사건을 들쑤셔대는 이들은 모두 종북이라고 몰아붙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천안함 랩소디'는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각종 의혹들을 제기한다. 군의 CCTV 영상, 천안함 절단면 미공개 등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도 나온다. "의혹을 거론조차 못 하도록 막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귓속으로 파고든다.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 등에 대한 논란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토론은 코미디에 가깝다. 청와대나 국정원은 묵언수행을 감행하거나 동문서답으로 일관한다. 대한민국이 그렇다고 했으니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사건도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국정원을 비롯한 경찰 국가보훈처 국방부 등 국가기관들이 지난 대선에 개입한 증거들이 밝혀졌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오불관언이다. “조금도 도움받은 일이 없다며 전 정권의 일로 치부할 뿐이다. 그러면서 사법부 판단에 맡기자고 한다. 이제 사법부까지 장악했다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임기가 끝날 때까지 법원 판결이 미뤄질 것으로 보기 때문인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꼼수이다. 이제 우리사회에서 신성불가침한 키워드는 천안함 사건뿐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여기에 국가기관 대선개입을 추가하려 할 것이다.

여기에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박근혜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의결하고 헌법재판소에 심판을 청구했다. 이와 함께 진보당 소속 의원들에 대한 국회의원직 상실 결정과 정당활동 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진보당의 강령 등 그 목적이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반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란다. 유신독재시절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정희 대표가 긴급조치 10라고 반발하고 나선 것도 납득이 간다. 이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은 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망령을 불러들여 이 땅의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정의를 난도질하고 있다고 격분했다.

이처럼 헌정사상 초유의 '정치공작'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종북 캠페인을 확대하여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사건으로 확대된 위기국면을 벗어나려는 것은 아닐까. 대선개입 의혹에 쏠린 여론을 종북몰이로 전환시키려는 꼼수가 엿보인다. NLL 논란과 역사교과서 왜곡 등 박근혜정부 들어 잇따라 벌어지고 있는 수구회귀적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이념전쟁의 연속선이다. 이미 예상됐던 수순대로 공안 정국을 만들어 국민을 공포 속에 몰아넣고 통치하겠다는 의도도 숨어 있다.

마침 박 대통령은 영국에서 여왕과 나란히 마차를 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동안 외국방문 때 국내에서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패션쇼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국내의 어지러운 상황은 나 몰라라일 뿐이다.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야당의 비판을 그저 정치적 공세로 몰아 붙였다. 국가기관의 선거부정과 정보기관의 정치공작, 그리고 멀쩡한 정당의 해산심판 청구를 비판하는 것이 정치공세로만 보이는 걸까.

연극이 끝난 뒤 관객과 배우들은 촛불을 밝힌다. 끊임없이 의혹을 던지면 감춰진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라는 염원 때문이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을 밝히려는 촛불이 서울에서,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구 꼴통의 외침은 연극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무대 위 애국 청년의 외침은 박근혜 정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촛불? 집어치우라고 해. 너희들 그 집회까지도 다 분열되어 있잖아. 우린 주류언론뿐만 아니라 SNS까지 다 장악했어. 일사불란하게 국가안보를 위해 행동하지. 내년 지방선거? 월드컵과 겹쳐. 3S에 중독된 우매한 국민들은 여전히 우릴 지지할거야.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 개나 주라고 해. 바람이 불면 그 분이 오신다고?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뿐이야.”

우리 앞에 놓인 모순과 부조리의 벽은 정말 거대하다. 우리사회가 유신독재시절로 역주행하고 있다는 지적도 오래됐다.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 유신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상상하기도 싫은 겨울공화국의 면면을. ‘천안함 랩소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우리, 제발 패배하지 말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