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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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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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혜 [sharptjfwl] 쪽지 캡슐

2002-04-08 ㅣ No.6032

 

 

우리보다 살림살이가 못한 나라에 가면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 갑니다. 한국에서는 지갑 두툼한 순서대로 줄을 세우면 뒤쪽부터 헤아리는게 빠른 처지면서도, 가난한 나라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갑부라도 된 듯 으스대려는 졸부근성, 아니 거지근성. 지금 생각해보면, 네팔에 들어갔을 때도 그런 꼬락서니였나 봅니다.

 

이런 증세는 간단한 접촉사고를 당한 뒤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봉사단으로 네팔에 나와 있던 한국친구를 만나서 시내라도 둘러본답시고 불러 탄 택시가 오토바이와 접촉사고를 낸 것 입니다. 아주 경미한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이 부서져 버린 차체를 보고, ’그러면 그렇지. 가난한 나라에서 뭔들 온전 하겠어.’하는 조롱이 먼저 떠 올랐습니다.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이번에는 손잡이가 뚝 부러져 버렸습니다. 힘 없이 떨어져 나간 손잡이를 들고 우리 일행은 말 없는 비웃음을 교환 했습니다. ’이것도 차라고…’

순하디 순한 얼굴의 기사는 역시 순둥이처럼 생긴 오토바이 운전자와 뒷처리를 하느라 우리들의 못된 행적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멱살잡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네 모습과는 달리 몇 마디 나누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로 제 갈 길을 가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이미 깔보는 마음이 가득 찬 마음에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 새겨질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식사 시간을 맞았습니다. 오만함은 끝간데가 없어서, 마음에 드는 식당이 나타날 때까지 기사를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끌고 다니면서도 미안한 줄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 동안 비용을 주고 차와 기사를 임대 했다는 생각이 전부였습니다. 식당 앞에 내렸을 때는 이미 계약시간을 넘기고 있었지만, 한 시간 정도 대기해 줄 것을 부탁 했습니다. 친구 일행을 숙소까지 데려다 주려면 차가 필요했기 때문 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불안에 사로 잡혀서 약속 장소에서 기다려주지 않으면 대기료를 주지 못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습니다.

 

하지만,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시내에서 겪은 사고 이야기 따위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밖에는 비가 줄줄 내리고 있었습니다만, 식당 안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약속 시간에서 1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이럴게 아니라 기사를 보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나와보니 약속 시간을 1시간이나 넘겼는데도 기사는 정해진 장소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 동안 굵어진 빗줄기를 사정 없이 맞아가면서 우리 일행을 기다렸던 것 입니다. 쫄딱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허약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저녁 어스름과 함께 닥친 오한을 참기 힘든 듯, 그는 가늘게 떨고 있었습니다.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비를 피할만한 지붕이 있었지만, 골목을 돌아선 곳이라 혹시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까 하여 그 비를 다 맞고 서 있었던 것 입니다. 미안해 할 쪽은 오히려 이 편인데, 그가 먼저 사과의 말을 꺼냈습니다. 너무 늦어서 데려다 주지 못하겠노라고,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 오늘 함께 좋은 여행을 해서 즐거웠노라고.

대시료 몇 푼이라도 더 주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며 미안하다는 얘기를 되풀이 했습니다. 돈을 더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없는 것을 보고 당황할까봐 기다렸다고도 합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선진국에서 온 나그네가 미개한 나라를 돌아본다는 식의 오만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천사의 생각을 가진 기사를 대했던 것이 미안했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의 넉넉하고 모자람을 평가하려고 했던 기준이 부끄러웠습니다.

 

가끔 외국인 노동자들과 마주칠 때마다 이름 모를 네팔의 그 택시 기사를 생각 합니다. 그리고 그가 가르쳐준 교훈을 되새깁니다.

 

’넉넉하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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