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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들의 자살? * (체리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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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철 [hl1ye] 쪽지 캡슐

2005-10-04 ㅣ No.498

 

                        고래들의 자살?


  십자가를 안테나로!

  그동안 전세계 도처의 바다에서 해안가에 떼지어 몰려나와 안타깝게 죽어갔던 고래들 즉 이른바 ‘고래들의 자살(?)’ 그 원인이 드디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놀랍게도 해군들의 음파탐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고래들을 연구하는 미국의 어느 과학자가 바닷가 자기 집 앞에서 매일 관찰하던 고래들이 어느 날 해변 위로 떼지어 몰려나와 죽어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고래들의 죽음에 대한 사인을 다각도로 조사하던 중에 그 시기에 미해군이 그 인근 바다에서 음파탐지기 실험을 했다는 것을 알아내었고 그 실험이 음파로 통교하는 고래들에게 치명적인 스트레스를 주어 결국 그들이 바다를 포기하고 해변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미해군은 ‘안보를 이유로 계속 음파탐지기를 쓸 수 밖에 없다’며 다른 지역으로 가 실험을 하기로 서로 합의를 보았다는군요.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다가 충격적인 내용을 접했습니다. 그것은 한국이 경제 경쟁률을 좀 상승하여 17위를 하였지만, OECD 가입국 중 청년 자살율은 1위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자살율은 최근 게임중독 등으로 돌연사하는 ‘자살성(?) 죽음’을 제외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청년 실업 등 경제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아무튼 엘리트 중심의 물질 만능사회와 우리들의 무관심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습니다. 참고로 자살에 관한 저의 글, 교회의 대책에 관한 김정우 신부님의 논문 그리고, 영화 ‘체리향기’를 소개합니다. 이 영화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죽음 직전에 체리나무의 향기를 우연히 맡고 삶의 의지를 갖게 된 것처럼 우리 크리스찬들도 이 암울한 시대에 희망을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향기’란 값비싼 향수를 많이 뿌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8.31 부동산대책 이후에도 집주인으로서 전세값을 안올린다든가... 뭐 그런 것이죠..^^*가브리엘통신


                         

                                       (영화 ''체리향기'')

 

                          <자살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어느 자매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가정생활이 너무 힘이 들어 한강에 뛰어내리기로 결심을 하고 워커힐에서 마지막으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한강에 뛰어들려고 했는데 그 한강물이 너무 아름답고 맑아 그 한강물을 오염시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 결심을 접었다고 합니다.


  요즘 정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 카드빚, 등등의 이유로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고 더이상 방관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살로 몰고 간 우리들의 이기심과 무관심등의 죄들을 반성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자살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죽기 전에 "자살, 자살...."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살자, 살자..."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고 늘 마셔왔던 공기가 마치 ‘체리향기’처럼 싱그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한국의 자살 실태와 교회의 대처 방안>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경제가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 이후 들려오는 소식들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실업과 기업의 도산에 따른 자살이다. 가장(家長)의 자살, 가족 동반 자살, 남편의 실업을 비관한 아내의 자살 등 우리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물론 자살자들의 생활고나 심리적인 고통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제 이러한 자살 분위기가 오늘날 경제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미노 현상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또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면 그렇게 자살했을까 하는, 자살을 묵인하는 풍조가 사회 속에 번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 사실 이전까지의 자살은 입시에 대한 강박감과 이성 문제로 충격을 받은 청소년층, 삶에 대한 회의에 휩싸인 노인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요즘은 30-50대가 경제적인 문제로 자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이 시대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상실되어 가는 현사회의 문제를 떠맡아 기초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의 몫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자살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그 대처 방안을 살펴보자.


1. 자살에 대한 일반적 이해


  역사적으로 볼 때 자살에 대해서는 지역의 문화와 시대적 사상에 따라 다른 입장을 보여 왔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불행한 처사로 생각하여 특별한 경우로 취급하였다. 군신들의 경우, 충성의 표시로 사용되기도 하며 황족에 대한 처형의 예우(禮遇)로 요구되기도 하였다. 한편, 같은 희랍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소크라테스(Socrates)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같은 철학자는 자살을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행위로 보았고, 스토이즘(Stoicism)에 속한 사람들은 자유인의 상징이며 권리로 보았다. 세네카(Seneca)는 자살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권리며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고상한 행위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이 지배하였던 중세기 서구 사회에서는 자살을 죄악으로 보아 금지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반(反)그리스도교 학자들은 계몽주의 이후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현대로 넘어 오면서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D. Hume, P. de Montesquiu, J. J. Rousseau, A. Schopenhauer, E. von Hartmann, F. Nietzsche등) 그러나 칸트(I. Kant0는 윤리성의 주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윤리성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라하여 자살을 배격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초 괴테(Gothe)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등과 같은 문학의 낭만주의 사조는 자살을 미화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물질주의 사조의 팽창과 함께 자살이 놀랄 정도로 유행하고 있으며,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진 급진적 정치 행동주의나 마약 복용은 궁극적 희망을 줄 수 있는 초월적인 가치들과 일상적으로 단절됨으로써 결국 자살로 이끄는 새로운 요인이 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사회 경제 문화면에서, 너무 유용성과 시간성 안에서만 측정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이나 평가를 소홀히 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유용성이나 현재의 가치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자살이나 안락사 등을 더 나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자살에 대한 사회적 상황을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 자살에 대한 교회의 견해


1). 성서


  성서에서는 자살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나타나 있지 않다(판관 9,54;16,30;2마태14,41-46). 성서에서는 자살을 직접 금하거나 종용한 적이 없다. 때로는 공동선(公同善)과 조국이나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기도 하였다. 판관기 16장 30절에는 삼손이 자기 생명을 희생하여 많은 적군을 죽인 사실을 말하며, 사무엘 상권 31장 4-5절에서는 사울과 그 시종 사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태오 복음 27장 5절에는 유다스가 자기의 죄책감 때문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성서에 나타나는 자살의 직접적인 사례들은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실로서 언급할 뿐이지 그 윤리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밖에 간접적 자살이나 선의의 자살 사례도 있지만 그 당사자들은 자기를 죽이도록 신적 영감을 받은 것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2) 교부 시대


  락탄시우스(Lactantius)는 자살을 불명예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으로 보았고 자살과 살인을 똑같이 객관적인 악으로 보았다. 그는 자살을 옹호하는 희랍과 로마 제국의 철학자들과 유명 인물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살을 윤리적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모든 자살자를 살인자로, 자신을 죽이는 것은 자기 살해로 보았다.

  교부 시대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의미하게 자기 생명을 끊는 것은 나쁘지만 순교 정신으로 자살하거나 정덕을 지키기 위해서 자살을 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에서, 어떤 교부는 칭찬받을 만한 선행으로 보았고, 다른 교부는 십계명의 제5계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예컨대 데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나 디오니시오(Dionysius)의 글에 나타나는 이야기(Eusebius, H.E., V. 1.41)를 에우세비오(Eusebisu0나 예로니모(Hieronymus)는 정덕을 지키기 위해 박해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자살한 일을 잘한 것으로 보았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런 자살을 하느님의 뜻이나 명령에 따른 것으로(nutu divin) 추정한다. 곧 순교자들의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하느님의 절대적 명령에 영웅적으로 순명의 행위로 응답한 것을 자살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암브로시오(Ambrosius)는 도덕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단안을 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만으로 초대 교회가 이런 종류의 신심적 자살을 그리스도교적 순교와 비슷하게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us)는 하느님께 직접 계시를 받지 않는 한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제5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모든 자살을 객관적 살인행위로 보았고, 구약에 나오는 자살 사례들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며 그 자체를 단죄하기 위하여 성서에 언급되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죄를 피하기 위해서든, 고통과 불행한 생활을 끝맺기 위해서든 어떠한 구실로도 자살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순결이나 다른 윤리덕을 지키기 위해서 자살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로 혹평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와 자제가 필요함을 가르친다. 곧 교회 전통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영감에 따라 영웅적 순종의 행위로 자살했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질료적(material) 자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 사례들에 대해서는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반면 의식적, 의지적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항상 죄책이 있으며, 자기 생명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윤리적으로 순수성을 잃은 사람이며 실제로 악을 행한 사람인 것이다.


3) 중세와 근세


  중세와 근세에 오면서 교회는 위의 의견들 중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설을 따랐고, 토마스 테 아퀴노(Thomas de Aquino)는 ’신학대전’에서 자살이 부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자살 행위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자연법을 거역하는 행위며, 둘째, 자살은 공동선과 단체에 손해를 끼치거나 모독이 될 수 있으며, 셋째, 자살은 생명에 대해서 절대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하느님의 권위를(신명32,39참조) 침해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세 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자살은 감상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죽음은 오히려 사람이 최종적으로 당할 수 있는 최대의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모든 악 중에서 가장 큰악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범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나 미래에 큰죄를 범하게 될 것이 두려워 자기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로 본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고 돕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으로 바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가장 큰 사랑(요한15,13참조)이라는 것을 토마스 데 아퀴노도 인정하고 있다.


4) 현대


   현재 가톨릭의 공통 견해는 자살은 그 자체가 죄며, 따라서 항상 부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자살은 십계명의 제5계인 "살인하지 마라"를 직접 어기는 행위다. 곧 자신을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의 모든 형태는 직접 살인에 해당한다. 둘째 생명에 대해서는 하느님만이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는데(신명 32,39참조). 자살은 이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육체와 생명에 대하여 주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진리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자살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살인은 인간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지상권의 침해다. 셋째,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 자연 법칙에 반대되며 자신을 완성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며, 더 이상의 인격 성장을 막아 버려 하느님께서 부르신 자기완성을 향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넷째, 사회적인 대인 관계에서 공동 책임과 서로의 영향 등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로 자살은 공동체와 구성원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쉽게 자살로 규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여러 사람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 독재자에게 항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맨주먹으로 무력 앞에 인간의 자유를 시위하는 일 등은 현시대의 특성이기도 하며, 이런 경우에는 어느 한편만을 정당하다고 말하기 전에 ’자살’이라는 범위에서 제외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놓은 부모들의 사랑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려는 군인들의 조국애 등은 특별한 종류로 보아 ’자살이다’ ’불가(不可)하다’라고 쉽사리 평가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생명은 최고의 선(善)이지만 절대적인 선은 아니기에 더 높은선을 향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서 나오는 숭고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3. 자살의 실태와 원인


1) 자살 실태

   자살의 동기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문화, 국가 정치, 성(性), 연령, 절기, 사회 조건-에서 생긴다. 곧 일정한 조건에서 자살자의 수가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자살은 소외, 마음의 고통, 고립, 분노, 죄책감, 심한 우울증 같은 감정들의 결과로서,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무력감을 느껴 자살하기도 한다. 자살 사례 가운데는 우발적인 충동에서라기보다는 계속되는 사회 경제적 압박에 따른 자살이 두드러져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은 바로 이러한 유형의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

  자살 통계를 보면 저개발국보다 선진국이 더 높고, 15-19세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수도권 지역의 중고생 59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6.8%인 276명이 때때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나라 대학생 중 절반이 넘는 55%가 자살 충동을 경험했고, 자살 충동의 가장 큰 이유는 ’장래의 불투명성’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학생(62.4%)이 남학생(49,5%)보다, 저학년(67.4%)이 고학년(47,5%)보다 자살 충동 경험이 많았다. 또한 도시 빈민지역과 농어촌의 가난한 중고생 가운데 68%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으며, 초등학생의 33%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인제대 상계 백병원 이상철 교수팀이 자살기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신과 고찰에 따르면 성별에서는 여성이 75%로 25%를 차지한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종교별로는 무신자가 70%로서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이밖에 미혼자가 58%이고 기혼자는 41%였다.

  자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38.8%가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고 응답했고, 48,8%가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 자살을 삶의 적극적인 표현 방식의 하나라고 응답한 비율도 11,5%나 되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명을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통계는 대부분의 자살이 우리 사회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부재나 혼란, 또는 사업 실패 등에서 비롯한 경제적 생활고에서 빚어짐을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 독일의 예를 보면, 자살자의 56%가 남자며, 연령으로는 40-50세가 가장 많고, 계절로는 6-9월이 가장 많고, 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지방이 가톨릭 지방보다 2-3배 더 많다는 것이다.


2) 자살 원인

   자살 원인은 대체로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살 동기는 스트레스가 전체의 40%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절망감, 분노와 연관된 공격성 및 난폭함, 수치심이나 굴욕감 등이다, 자살자의 동기나 이유는 어떤 공통점을 나타내고 있다. 이 공통점을 잘 종합하여 비교 연구하면, 그 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조정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일종의 공통성에서 사회 심리학과 통계 심리학 등에서는 어떤 법칙을 발견하려 노력하고 여러 가지 설을 내놓기도 한다.


(1) 뒤르켐(E. Durkheim)


   뒤르켐(1858-1917년)은 사회학자로서 자살자의 심리현상을 자신이 보호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안정감이 없을 때, 사회의 윤리적 타락으로 인생의 의미를 잃었거나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라고 했다. 그리고 뒤르켐은 모든 자살을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 상태의 자살 등 세 가지 일반적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아노미’는 인간의 열망에 대한 문화적 규제의 결핍과 한 사회의 신념 체계들 간의 갈등을 뜻하기도 한다. 아노미는 또한 사회적, 개인적 수준에서의 문화적 목표와 제도적 수단 간의 불균형과 소외(alienation)의 심리적 조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2) 링켈(E. Ringel)


  링켈은 자살에 대한 논설에서 자살하는 자들의 심리적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패배감을 느낄 때다. 발전과 성장을 지향하지만 자기 능력이나 여건의 부족과 한계를 느끼게 될 때 좌절감, 열등의식, 불안, 무기력 등을 갖게 되며, 따라서 자아의 성장이나 발전을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둘째 자책이다. 자기의 잘못이나 욕구 불만이 있을 때 이것을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고, 발산시키지 못하면 내향성을 가지게 되고 이에 따라 밖으로 향한 공격 심리, 파괴, 분노, 불만 등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것의 구체적 표현이 자학이나 자살이다.

  셋째, 현실 도피다. 충족시킬 수 없는 욕구가 자기 안에 들어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나 동경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현실과 이상의 부조화나 모순을 억지로 조화시키고 합치시키기 위한 제3의 가능성으로 발생하는 동경(憧憬) 자살이 있다. 곧 죽음으로 소원이 이루어지거나 헤어날 수 없는 모순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히 젊은 층에서 많이 일어난다. 현실에서 자신의 희망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적 현실로 죽음을 보는 것이다.

  한편 자살에 변태 심리가 얼마나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통계가 없다. 인간의 심리는 반드시 반사 작용만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독일 의사들의 통계에 따르면 자살의 20%는 정신 질환에서 오고, 60%는 정신병적인 성격에서 오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자살 당시의 자살기도자에게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발휘할 판단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부족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온전한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한 사람의 죄의 책임을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4. 대책


  많은 경우 자살은 사회적 죽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곧 자살 기도는 흔히 최후의 방편으로서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에게 통교와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다. 또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버림을 받았거나 사회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함으로써 도와 달라고 외치는 마지막 절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이러한 자살을 방지하는 데 노력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교회는 먼저 개인에 대한 윤리 교육을 실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신성 불가침성을 강조하고 이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참된 교육에 힘써야 하며, 정신 질환이나 심리적 불안정 요인을 치료할 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돌보아 주어야 하고, 사회적 측면에서는 인구 분산과 노동 조건의 개선 그리고 소외 계층에 대한 사회 복지적 배려 등에 신경을 써야겠다.

  또한 자살을 방지하는 일이 자살 기도자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라는 일부 현실주의자들의 비난은 수용될 수 없다. 자살 기도는 대부분의 경우 더 많은 관심과 사랑, 그리고 더욱 효과 있는 도움을 호소하는 최후의 부르짖음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방지하는 방법은 지속적인 감시가 아니라 사랑에 찬 관심과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사랑이 자살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방지해야 하는 의무는 광범위하다. 자살의 깊은 원인을 발견해야 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그 원인을 없애야 한다. 따라서 자살을 방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진정제를 투여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의 일반적인 악조건까지도 없애는 작업을 포함한다. 곧 윤리 원칙들이 문화에 적응할 것이 아니라 문화가 가장 고상하고도 영원한 가치인 윤리적 가치에 따라 쇄신되어야 할 것이다.


  나오는 말


  죄가 되는 자살 행위란 개인적으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완전히 자유 의지로 끊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은 현세 생명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큰 잘못이 된다고도 할 수 있지만, 현실 생활을 해 나아가는 동안 "하느님께 받은 소명"을 봉사의 정신과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보존하려 들지 않고,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태도라는 것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앞에서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았듯이 그 원인 면에서 볼 때, 자살자에 대해 무조건 단죄하기보다는 사목적인 면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교회법에 따르면 자살자가 주위에 악한 표양을 보지 않았다면 공개적 죄인 취급을 하기보다는 그 인간적 행위의 장애 요인을 참작하여 유가족을 위로하고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사목적 태도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살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우 신부 / 대구 효성가톨릭 대학)

 

                                             영화 <체리향기>


  한 남자가 자동차를 몰고 황량한 벌판을 달려간다. 그 남자, 바디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있는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자신의 시신 위에 흙을 덮어줄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다. 하지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는 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뿐. 앳된 군인도, 온화한 신학도도 단호히 죽음이란 단어를 외면한다.

  그런데 드디어 그의 부탁을 들어 줄 사람이 나타났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쓸 새의 박제를 만드는 바게리 노인은 바디에게 자신의 이제껏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며 작지만 소중한 삶의 기쁨을 하나씩 꺼낸다. 바디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삶에 강한 애착을 느끼지만, 수면제를 먹고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 눕는다. 때맞춰 비가 내리고 사방은 어둠에 휩싸이는데 갑자기 체리나무 향기가 바람결에 바디에게 찾아오고 바디는 힘차게 구덩이를 박차고 일어난다...


                                         <성서묵상>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당할 사람에게나 다 같이 풍겨 나가지만,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향기의 구실을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2고린 2, 15-16)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 / http://hompy.dreamwiz.com/hl1y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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