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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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 어느 사형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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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kimhh1478] 쪽지 캡슐

2016-07-15 ㅣ No.88081

 

신앙고백 - 어느 사형수의 기도
 
사제서품 후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면 사제서품을 받고 첫 보좌신부로

있던 성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26년 전 혜화동본당 보좌신부로 있을 때

교도소로부터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신부님이십니까? 저는 서대문교도소의

신자교도관인데 지금 즉시 교도소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때 "제가 무얼 잘못해서

교도소로 오라는 거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고 극비이므로 전화로는 말할 수 없고

오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상대는 전화를 끊었다. 1972년 5월 어느 봄날

오전 10시경으로 기억된다. 교도소 정문에 도착하자 전화를 건 교도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잡수시고 저의 말을 들어주십시오"하면서 교도관이 말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들 중에 환자가 있어 병자성사나 병자 영성체를 요청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 5명의 사형수가 집행되는데 그 중에 2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어

신부님을 부른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지금도 사형집행 말을 들으면 놀라겠지만

그때는 병아리 신부로서 교도소 가는 것도 부담스러울 때인데 더구나 사형집행을 참관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곧 이어 안내를 받아서 들어간 곳은 사형장이었다.

약 50평 남짓한 방에 30여 명의 교도관들이 경호를 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8명의 참관인이 있었고 한쪽 끝에는 목사님도 와 있었다.

내가 늦게 참석하여 10시부터 시작된 사형집행은 이미 첫 번째 사형수가 심문 절차를 밟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첫 번째 사형수를 보고 얼마 후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구나 생각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니 창백하다 못해 경련을 일으키면서 살려달라고 소동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정사정없이 절차가 끝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어서 두 번째 사형수도 들어와서

절차를 밟고 나서 교수형에 처하기 직전에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라고 외쳤다. 김일성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말이었다. 그날 공교롭게도 5명이 모두 간첩이었다.

 
 
그때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것을 외치면서 죽는 사형수를 볼 때

'공산주의가 무엇이 좋아서 저렇게 까지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그들의 신조로서 그렇게 했을 것으로 본다. 세 번째 사형수의 차례가 되었을 때

똑같은 절차가 끝나자 앞에 두 사람이 너무나 힘겨워하면서 마지막 죽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집행관은 느닷없이 "당신 뭐 할 말이 없느냐? 여기 목사님도 계시고 저기 신부님도 계신데

하느님이라도 믿어 볼 마음이 없느냐?"하고 제안을 했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네가 죽는 마당에 천당이 있다던데 혹시 아느냐.

하느님이라도 믿어서 천당이라도 가게 될는지? 지옥이 있다던데

혹시 하느님이라도 믿어서 천당에라도 가고 싶지 않느냐는 말로 들렸다.
 
 
 
나는 혹시 그 세 번째 사형수가 대세라도 달라고 하면 내려가서 주려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 사형수는 그런 권고를 한 집행관을 빤히 쳐다보면서 "뭐라고? 하느님을 믿으라고?

나를 죽게 하는 하느님을? 그런 존재는 필요 없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하느님을 저주하였다.

그도 결국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자기의 죽음을 저주하고 죽었다.

그러한 사형수의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는 참으로 울적한 마음으로 세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곧 이어 네 번째 사형수 집행 안내방송이 나왔다. 네 번째 사형수는 차례가 되자

신자 교도관이 저에게 "이번 사형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영세한지 3개월 됩니다.

제가 대부입니다" 하고 말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교도관은 아주 열심히 재소자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대자도 수백 명 두었다고 했다. "신부님, 사람 죽는 것 보셨지요. 제 대자도 저렇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야 되는데 기도해주십시오" 네 번째 죄수가 들어왔다. 절차를 다 끝내고

똑같이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 하는 집행관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들고 단상 위를 치켜보다가

사제복을 입은 나를 보더니 "저 신부님을 제 앞으로 오시게 해주십시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앞으로 내려갔다. "신부님, 마지막으로 고백성사를 보겠습니다."

1분이 지나 2분이 지나도록 그 네 번째 사형수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얼마 후 떨리는 목소리로 "신부님, 고백성사를 볼 수가 없습니다. 떨려서 안되겠습니다"†

“영세 받은 지 석 달밖에 안 되었고 의향으로 불렀으니 고백을 안 해도 되겠습니다.

정말로 회개하시고, 이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서도 용서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다. 성체를 모시고 난 그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았다.

일이 분이 지났다. 집행관이 몇 분을 더 기다려주더니 “신부님, 그 사람의 손을 놓아주세요.

시간이 없어 빨리 집행해야 됩니다." 3분이 지나 제가 손을 놓았고 죽음 직전에는

 "신부님. 대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말을 남겼다.

 
 
다행히 그는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만세’도 부르지 않았고 ‘살려달라!’고 발버둥치지도 않았다.

고백성사와 성체를 영한 그가 숨을 거두자 진중하게 지켜보았던 교도관 대부가 저한테 와서

"신부님 잘 되었습니다. 우리 대자가 저렇게 마지막으로 잘 가길 기도해왔는데

하느님이 도와주셨습니다"얼마가 지났을 때 마지막 다섯 번째 사형수의 차례가 되었다.

바로 이 다섯 번째 사형수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작은 창을 통해 보이는 감방으로부터

사형집행장까지는 20여 미터밖에 안 되지만 이삼십 명의 교도관들이 줄을 맞추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먼저 4명의 사형수들은 감방으로부터

나오는 순간부터 소리소리 지르면서 "난 안돼요."

 
 
그랬는데 다섯 번째 사형수 차례가 되자 다시 그 신자 교도관이 다가오더니

"신부님, 저 사람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 사람은 교도소 생활 10년을 했으며

이미 3년 전에 세례를 받아 신자로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수도자처럼 살았습니다.

저 사형수 때문에 많은 재소자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고 사형수들 중 3분의 2가 가톨릭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해주었다. 밖에 바로 그 사람이 나타났다.

옥문이 열리면서 그가 나오자마자 자기를 호위한 30여 명의 교도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앞의 네 사람하고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모두들 안녕히 계십시오. 그동안 제가 여기 있는 동안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저는 지금 떠나지만 후에 뵙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정말 저 사람이 사형수인지 공항에서 외국에 나가는 사람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이윽고 그가 사형실로 들어왔다. 역시 그에게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는 언젠가는 오늘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준비해 놓은

유서를 읽어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의 유서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었기에 아마 모르긴 해도

그의 말 가운데 단어 하나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지금 그대로 이 자리에서

전해 드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행복한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도소에 와서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하느님을 만났다'고 표현했다.

“이제 저는 조금 후에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저는 저의 죄과로 죽어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용서하시고 하느님 나라로 불러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저는 죽으러 갑니다.

제가 죽는 순간 하느님 앞으로 갑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제가 잘못한 모든 죄를

모든 이에게 사죄드립니다. 끝으로 사형수로서 주제 넘는 말이지만 저의 죽음을 지켜보는

여러분께서도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찾으시려거든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제가 하느님을 만난 후부터 가장 소중하게 가졌던

이 기도서를 저의 중3 딸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잠시 후에 운명하거든 저의 두 눈을 빼어서 실명한 사람에게 주십시오.

이상입니다"그는 유언을 마치고 나를 불러서 지난날의 죄를 고백하는 고백성사를 보았고

내가 성체를 영하여 주었을 때에는 그가 법으로 입증된 사형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이미 가 있었던 천사의 얼굴이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성체를 영하고 나서

마지막 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그를 묶게 되었다. 손과 다리, 발목을 묶어 들어서

형틀로 옮기는 도중에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포승줄로 묶여 있는

자신의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얼 꺼낼 수 없으니까 꺼내달라고 하였다.

교도관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낸 것은 묵주였다.

 
 
손을 합장하더니 "묵주를 손에 감아 달라"고 하였다. 교도관이 손에 묵주를 감아주었다.

"됐습니다." "진행하십시오." 죽기 전에 그는 “예수 마리아여! 저를 도와주십시오"를

3번 큰 소리로 외치면서 조용히 운명을 했다. 그가 숨지자 사방도 조용해졌고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참관인들 교도관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 그의 명복을 빌었다.

하느님이 누구이시기에 가톨릭신앙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죽음이 당연하게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이 세상의 어떤 누구도…. 우리의 삶이란 어쩌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는

기나긴 여정일지도 모른다. 행복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떠날 수 있었던 마지막 사형수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삶속에서조차 감사할 줄 모르고 있는

나를 반성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의 소중한 삶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은총을 구해본다.
 
 
 
위 글은 나원균 바오로 몬시뇰이 혜화동 보좌신부시절

사형수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옮긴 것이다.

Monsignor은 가톨릭 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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