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PBC특별기획 드라마 - 강완숙 3부작 (11월 20일 첫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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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문화홍보국 [commu] 쪽지 캡슐

2007-11-07 ㅣ No.246

영상으로 빚어낸 그 숭고한 삶과 신앙의 기록

한국 교회 최초의 여성회장...강완숙 골롬바

PBC특별기획 드라마 - 강완숙 3부작

평화방송 성석호 프로듀서 ☎ 02) 2270-2615

 평화방송TV는 한국 교회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강완숙 골롬바(1761-1801)’의 숭고한 삶과 신앙을 다룬 ‘PBC특별기획드라마 - 강완숙(3부작)’을 제작, 11월20일부터 매주 화요일 연속 방영한다.

  ‘드라마 강완숙’은 평화방송 TV가 지난해 케이블TV 제작사로는 처음 선보인 사극 드라마 ‘성 김대건’(3부작)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순교자 시리즈다. 


 이번 드라마에는 대장금의 한류스타 양미경(엘리사벳)씨를 비롯해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30여명의 배우들이 출연한다. 조선에 입국한 첫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역에는 중견탤런트 차광수씨가, 강완숙을 그림자처럼 보호했던 숯장이 서용진역은 최재원씨가, 강완숙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지만 결국 주문모 신부를 조정에 밀고하는 심덕역은 오지영씨가 맡았다. 주인공 강완숙 역을 맡은 양미경씨는 “초창기 조선교회를 이끈 여성 순교자 배역을 연기하는 감회가 남달랐다”며 “모든 스태프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만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드라마 강완숙’은 MBC 문화동산내 ‘대장금․허준’ 세트장과 남한산성, 풍수원 성당, 남양주시 종합촬영소 등을 배경으로 지난여름과 가을에 걸쳐 촬영됐다. 늦더위와 게릴라성 폭우, 짧은 제작기간과 부족한 제작비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출연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특히 양미경씨는 지상파 드라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출연료에도 불구하고 70여명의 스태프들을 위해 깜짝 불고기 파티를 마련, 계속된 촬영에 지친 제작진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연출을 맡은 평화방송 TV 김수형 부국장은 “힘든 강행군 속에서 불편한 내색 한 번 비추지 않고 혼신의 연기를 펼쳐준 출연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한편 평화방송 TV는 내년에도 순교자 시리즈 3탄을 제작, 케이블 TV의 컨텐츠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엄혹한 신분 차별 사회였던 조선 후기, 인간 평등과 인류애를 전파했던 천주교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를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 방송시간

1부

11월20일(화) 16:00 / 21일(수) 23:00 / 22일(목) 11:00

23일(금) 21:00 / 24일(토) 16:00 / 25일(일) 20:00

2부

11월27일(화) 16:00 / 28일(수) 23:00 / 29일(목) 11:00

30일(금) 21:00 / 12월 1일(토) 16:00 / 12월 2일(일) 20:00

3부

12월 4일(화) 16:00 / 5일(수) 23:00 / 6일(목) 11:00

7일(금) 21:00 / 8일(토) 16:00 / 9일(일) 20:00

 

○ 강완숙(1761-1801, 세례명 골룸바)

 

  ‘조선교회 첫 여성 회장’으로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강완숙의 삶은 ‘신앙’으로 보석처럼 빛난다.역사가 증언하는 강완숙은 양반이라는사회적 기득권을 신앙을 위해 포기한 여성이었고, 자신이 믿는 진리를 구현하고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교한 조선교회의 구심점이었다. 신앙을 통해, 전교를 통해 새 역사를 개척한 신여성, 그는 바로 강완숙이었다.

강완숙은 충청도 내포지방의 향반(鄕班)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충청도 덕산에 살던 홍지영에게 후처로 시집을 간다. 혼인한 지 얼마지 않아 충청도에 천주교가 전해지자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며 교리서를 구해 읽고 믿었다(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상권).

1791년 신앙 때문에 남편과 떨어져 시어머니와 딸, 전처 아들 홍주영(필립보)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강완숙은 서울 남대문 안 창동(현 남창동)에 정착한다. 이 때부터 강완숙의 교회활동이 본격화한다. 강완숙은 지 황(사바), 윤유일(바오로) 등과 함께 조선교회 사상 첫 사제 선교사인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 영입에 나서 입국 경비를 전담하고 이후 경제적 뒷받침을 한다. 1794년 12월 23일 조선 입국에 성공한 주 신부에게서 조선교회 첫 여성 회장에 임명된 그는 여성 전교를 도맡았고 교회 사무를 맡아봤다. 미사 첨례는 물론 교리강습 겸 강학회를 주관한 것도 그의 집에서였다. 정조의 동생 은언군 이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 참판 이중복의 아내 신소사 등 왕족과 양반가 여성에 대한 그의 전교는 눈부셨다. 강완숙의 활약에 힘입어 주 신부 입국 당시 4000여 명을 헤아리던 조선교회 신자는 6년 만에 1만여 명에 이른다. 이 중 상당수가 여성 신자였던 것을 감안하면, 여성 회장으로서 강완숙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다.

1800년 개혁을 주도하며 천주교를 옹호하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박해의 피바람이 몰아친다. 강완숙이 붙잡혀간 것도 이 때다. 주 신부와 신자들의 피신 장소를 마련, 안전한 곳으로 옮겨 체포를 모면케 했으나 정작 자신은 그해 2월 24일 일가와 함께 체포됐다. 주 신부의 행방을 대라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의 음성이나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자 형리들은 "이는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주 신부는 교인들의 희생이 커지자 자수, 1801년 4월 19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함으로써 조선교회 첫 외국인 순교 성직자가 됐다. 강완숙도 3개월 뒤인 그해 7월 참수당했다.

 

문화홍보국 원미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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