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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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論 /마리아론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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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식 [alkim5533] 쪽지 캡슐

2011-03-02 ㅣ No.59200

               그리스도論 / 마리아론 28 회
 
  * 그리스도論
     그리스도  논쟁
     이단 이설
     이단 이설, 이교
     공의회
     삼위일체론
    
     마리아론                           (승전)
 
     

II.  중세이후의 마리아 신심과 역사


교부들에 의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과 그 의미가 점차적으로 발전한 이후, 중세는

마리아의 특전과 그 기능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베르나르도 (1090-1153)는 마리아의 중재 역할이란

하느님의 모든 은총과 자비가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

서는 전해질 수 없는 관계수도() 와 같은 것임을

강조하였다* (PL 183, 429-238). 12세기의 스콜라

철학은 마리아의 무워죄성 ()  에 대한 주제를 다시

거론하여 논쟁을 이르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

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계시 진리로부터 시작하여

마리아의 거룩함, 동정성, 그리고 존엄성을 연구하였으

며, 둔스 스코투스는 교회가 원죄로부터 보호된 마리

아를 선언하려는 것을 에워싼 주요 문제들의 신학적

해결을 시도하였다.

*  베르나르도 학자의 견해

1439년 바젤공의회는 무염 시태(성모의 원죄없으신 잉

태)를 신앙 조항으로 선언하였지만 합법적으로 인정 받

지는 못하였다. 교황 식스토 4세 (1471-1484)는 무염

시태와 관련된 축일을 허락하였으나, 무염 시태 교의를

반대하는 입장이 더 많았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는 교부들의 불일치로 무연시태에 관한 문제를 회피하

였다.


마리아 공경에 관하여 종교 개혁자였던 루터나

칼뱅은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성서 만

으로, 은총 만으로, 신앙 만으로“ 를 내세운 루터

는 마리아의 중재성을 반대하였다. 종교 개혁자

들은 가톨릭 신자들과의 논쟁 중에 마리아에 대

하여 반대 입장을 취하였고, 가톨릭에서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마리아 신심이 더욱 확대되었다.

19세기에 새로 창설된 수도 단체 및 전교 수도회

는 사도직을 교회에 대한 마리아의 역할과 관련

시켜 마리아를 사도적 사명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마리아에게 봉헌하고 마리아를 본받음을 통해서

사도적 열성을 드러내려 하였다. 또한 라 삿렛트

(La Salette, 1846), 루르드 (Lourdes, 1858),

녹크(Knock, 1879), 파티마 (Fatima, 1917) 등

지의 마리아 발현과 관련된 성지 순례는 신자들

의 마리아 공경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마리아 신심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의 무염시

태교의 선포로 그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 시기에

는 마리아의 중재성과 무염 시태가 주요 주제로

제시되었다. 1917년 파티마의 성모 발현과 더불어

20세기에는 구원 사업에서의 마리아의 중재성, 영

적 모성, 공동 구속설* 과 관련된 마리아 신심 운

동이 활발하게 시작되었고,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교의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두 가지

진리에 관한 신학 연구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신

앙에서 비롯된 보다 진지한 정의로 더 기울어졌다.

이렇게 마리아 연구가 활발해진 가운데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

포하였다. 

* 마리아의 공동 구속설은 학자의 견해임.

* 참고 : 한국가톨릭대사전 4권 1995년 판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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