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5일 (토)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정치性 재판의 ‘배심 평결’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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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3-11-01 ㅣ No.479

기초질서의 위반이라 할지라도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우고,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사안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묻는 것은 공동체의 유지·발전을 위한 불가결한 선택이다. 그런 점에서 법의 집행 과정 가운데 하나인 재판에 공정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은 국가와 사회의 안전을 위한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법재판이 정치적, 또는 이념적 편향성으로 얼룩진다면 재판으로 인해 정치적 대립이 심해지고 종국적으로는 사회를 분열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최근 통합진보당의 대리투표와 관련한 법원의 판결에 정치적 편향성 우려가 대두되더니, 공직선거법상의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된 안도현 시인의 국민참여재판에서 나타난 평결에 대해서도 정치성(政治性)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국민참여재판의 문제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치와 이념으로부터 독립돼 그 사회의 중립적 가치와 객관적 정의가 보장되도록 해야 할 사법재판마저 정쟁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국민참여재판은 국가권력에 의해 독점된 사법재판에 국민이 직접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를 통해 객관적 균형을 이루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제도다. 그러나 배심원제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영미권에서도 편파적 평결과 관련해 적잖은 논란이 계속돼 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92년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로드니 킹’ 사건이다. 흑인 피의자에 대한 백인 경찰의 무차별적 구타와 관련, 흑인 배심원 없이 대부분이 백인으로 구성된 해당 배심은 무죄 평결을 내렸고, 이로 인해 미국 사회 전체가 술렁거리고 흑백 간의 대립이 심해졌던 사건이다.

또 얼마 전 있었던 애플과 삼성 간의 특허침해 사건에서 미국인으로 구성된 배심원이 애플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은 편파성 우려를 사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도 배심 제도의 폐해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국민참여 제도를 도입한 지 5년여에 불과한 우리나라에서 이에 대한 문제점 지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단순한 불균형의 문제를 넘어 정치적 편향성이나 이념적 대립성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냥 두고 볼 일만은 아니다. 인민재판식 결과로 불신을 사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지난 24일 있었던 ‘나꼼수’ 주진우·김어준 피고인에 대한 평결에 이어, 28일 내려진 안 시인의 허위사실 공표에 대한 평결은 그러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사건의 재판부는 배심원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야 하나 헌법과 법률, 직업적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하는 바 배심원들의 무죄 판단과 재판부 견해가 일부 달라 선고를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배심원들이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정치적으로 선택했다 할지라도,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의 자격에서는 피의 사실을 중립적으로 판단해 법률에 합치하도록 평결했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않은 점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법관의 양심과 가치 판단에 따라 내린 법적 결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참여제가 그 본질적 목적인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나름대로 달성하고 있지만, 나꼼수나 안 시인 재판에서 보는 것처럼 정치적 편향성에 기반한 판단이 지속된다면 국민참여제의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비록 배심원의 평결에 구속받지 않을 수 있는 재량이 재판부에 주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일단 평결이 내려지면 사법적 판단에 정치성이 개입된 결과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 정치적 대립성을 담고 있는 사건은 국민참여제 신청이 있더라도 이를 배제하는 것이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과 국민적 통합을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다.

 

- 성재호/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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