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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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에 달린 노란 손수건 *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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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철 [hl1ye] 쪽지 캡슐

2005-10-24 ㅣ No.517

 

                 십자가에 달린 노란 손수건


  십자가를 안테나로!

  오늘은 10월 24일인데 ‘사과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즉 평소 쑥스럽거나 거북하여 사과나 용서를 청하지 못한 분들에게 과일인 사과를 선물하면서 ‘사과를 실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난 23일 자유로 임진각 나들목 근처의 한 소나무에 납북자가족협의회 최우영(35) 회장이 납북된 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가족들과 함께 노란 손수건 400장을 매달았다고 합니다. 이는 감동적인 실화를 모아 놓은 ‘노란 손수건’이라는 책 즉 ‘교도소에서 석방된 남편이 ‘날 기다린다면 마을 어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달라. 그게 없다면 미련없이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그 마을을 지나가겠다’는 편지를 썼는데, 그의 아내가 마을 어귀에 있는 참나무에 100여개의 노란 손수건을 매달았었다‘는 내용을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에 미국의 어느 성당을 방문했는데 제대 뒤편에 있는 큰 십자가에 흰색의 영대모양의 천이 걸쳐져 있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때가 부활시기여서 그런지 그 흰천이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남겨진 수의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전례력으로 대림시기이고 또 판공성사를 보는 은혜로운 시기인데 이번에는 전통적인 ‘자색의 영대나 천’보다는 화해와 용서를 상징하는 ‘노란색 영대나 노란 손수건’을 성당의 십자가에 걸쳐놓으면 어떨런지요? 그리고 고백소(영적 세탁소)에 들어가면서 찜통같은 그곳에서 몇 시간 수고하시는 신부님께 과일 사과도 한 알 선물하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참고로 전에 올린 저의 글을 소개합니다. 가브리엘통신


                                    <하느님의 항복>


  로마 유학시절에 성당을 순례하다가 가끔 본 아름다운 광경은 성당안 고해소에서 고백성사를 보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입니다. 저는 그 진지한 고백성사광경을 보다가, 엉뚱하게도 전에 어느 할머니가 고백소 안에서 '신부는 죄인에게 강복하소서!’라는 기도문을 잘못 보고 '신부는 죄인에게 항복하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는 에피소드가 생각이 나, '씨익’ 하고 웃어 봅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가을을 보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가을 단풍을 못본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말에 교외에 나가면 볼 수 있겠지만 시내에서 서울 덕수궁 돌담길과 같이 낙엽을 밟으면서 거닐만한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한국의 가을 단풍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은행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수녀님이 좋은 피정이 있다고 하여 속아(?) 참석한  예비 신학생 피정에서 지도신부님께서 '은행나무와 같은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신부님은 은행나무는 나뭇잎, 열매, 나무, 등...,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며 은행나무의 경제성을 강조하셨는데, 저는 '노란 손수건'이란 단편 소설을 읽고 그동안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경고장'(Yellow Card)과도 같이 생각되었던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하느님의 노란 손수건’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기에, 더욱 더 한국의 노란 은행잎이 그리워집니다.


  또 로마에 와서 겨울에 더욱더 아쉬웠던 것은 하얀 눈을 못본 것입니다. 로마의 겨울 날씨는 지중해성 기후라, 겨울에 오히려 흐린 날이 많고 비가 많이 옵니다. 저는 이 하얀 눈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하느님의 항복’(백기?)이라는 걸 수년 전에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요즘은 '테러’라는 단어가 인터넷 검색어의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영화를 볼 때만 해도 테러는 극히 일부 특정지역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일원인 제리라는 청년이 폭탄테러의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됩니다. 제리는 교도소에서 모든 것을 저주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불우한 성장과정을 비관하며 가족들의 면회마저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 청년에게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훌륭한 아버지 쥬세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자신도 테러의 공범이라고 허위자백을 하여 아들과 같은 교도소에 갇히게 됩니다. 제리는 이러한 아버지 쥬세뻬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더 그를 미워하고 다른 죄수들과 합세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합니다. 하지만 쥬세뻬는 그 모든 것을 사랑과 인내로 받아들이고... 마침내는 미움과 분노가 가득찬 교소도의 죄수들을 사랑으로 따뜻이 녹입니다. 마침내 다른 죄수들과 함께 제리도 서서히 그 희생적인 아버지의 사랑에 녹아들어 갑니다. 이제 그 교도소에서 그 아버지의 이름, 즉 쥬세뻬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심지어는 간수들도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쥬세뻬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날 밤 교도소의 모든 죄수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창밖으로 하얀 종이조각을 일제히 날립니다. 이 하얀 종이조각들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쥬세뻬의 사랑 즉,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우리 모든 죄인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겸손’을 상징하는 흰눈처럼 교도소 밖의 차가운 땅바닥에 소리없이 쌓여만 갑니다."


  아마 해마다 크리스마스 대형트리와 함께 성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서 수개월동안이나 참된 성탄의 의미을 깨닫게 하고 있는 말구유의 아기 예수님도, 분열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성프란치스코도, 또 얼마 전에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씨시에서 모여 기도했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도, 이 ‘하느님의 항복’을 실천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하느님의 항복’(내탓이오!‘)을 실천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요? 성당에서는 신부님이 먼저, 집에선 아버지나 시어머니가 먼저, 학교에선 선생님이 먼저 그 항복을 실천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항복‘이 우리에겐 굴욕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이 겨울에 하얀 눈이 아닌 하얀 가루(탄저균), 하얀 재(핵폭탄 낙진)가 흩날리지 않도록, 이 ‘하느님의 항복’을 본받읍시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아가 화해를 청하고 항복하는 사람이 됩시다. 

 

                                         <성서묵상>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루가 15, 21-24)

   

                                                               (이현철 /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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