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성지순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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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욱 [juhappylife] 쪽지 캡슐

2005-09-28 ㅣ No.454

 

2005. 9. 11(일) 성모성심 꾸리아 소속 4l명으로 경기도 이천 단내성지 순례(巡禮)를 떠났다. 떠나기 전 성당에서 신부님의 강복을 받고 약간 출발 계획보다 늦은 8.20분 쯤 출발할 수 있었다. 남양주 퇴계원 구리를 거처 대전방향으로 접어드는 코스 길 옆으로 산과 들은 소나기 온 뒤처럼 물기 머금은 작은 푸른 초목들로 상쾌한 날씨가 신선함을 더해 주었다. 시골내음이 코로스며 드는 구수함은 마구 버려지는 공해로 가끔 속상하는 것 빼고 이땅은 참 아름답다고 감탄할 만하다. 오늘따라 일요일 아침은 교통이 쉬원쉬원하게 잘 뚫리는 지라 기분 또한 만점이었다. 한 서울 덤프추럭에서 내어품는 시커먼 연기냄새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꾸리아 간부님들이 정성껏 준비한 김밥으로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묵주기도, 103위 성인 호칭기도로 오늘 하루 순례를 시작하는 사이 어느 틈에 단내성지에 도착하니 10.30분 쯤, 약2시간 소요된 시간이지만 잠간 사이에 도착한 것 같다. 버스를 통하여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산등성이의 예수님 상(예수성심상)은 이 죄악의 세상을 가슴으로 안듯하는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성지입구로 통하는 길옆에는 시냇물이 강처럼 흘러 띄엄띄엄 낚시하는 모습도 볼 수 있어 옛날 박해시대에는 정적(靜的)이 감도는 아름다운 두메산골 마을이었음을 짐작해 본다. 단내는 한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우 촌이고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지라고 한다. 성지에 들어서니 작은 건물(소성당) 하나, 식당, 요셉성인, 성모님 상과 정베드로 순교자를 중앙으로 조성된 십자가 화단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조금 위쪽으로 발을 옮기니 작은 사무실, 본당, 그리고 성가정광장 중앙에는 성가정상(예수님 가족) 이 있고 5위성인 순교비(이문우 요한 성인, 이호영 베드로 성인, 이소사 아가다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성녀,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 등 이천출신 순교비)가 잘 조성되어 있다. 그 위쪽에는 정은바오로(1804-1866) 와 정 베드로(?-1866) 순교자의 묘가 있으며 또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야외미사가 봉헌되는 야외제단 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님 상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순교자 광장이 있다. 사무실 위쪽으로 좁은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우측방향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고 그 위로 와룡산의 계곡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총연장 5.2km의 순례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이 순례코스는 전망이 좋은 와룡산 정상에 위치해서 이문우성인의 고향과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경로를 조망할 수 있는 예수성심상과 병인박해를 전후해서 박해받는 신자들의 은신처였던 검은 바위와 굴 바위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로를 따라 조성되었다고 한다. 단내성지를 방문해 보면 하나하나 김성배 성지개발 신부님의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해 애쓴 땀이 베어있는 성지라는 것을 당장 알 수가 있다.  성지순례(聖地巡禮)란 여기저기 차례로 성지를 둘러보며 참배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 진리를 따라 하느님 백성으로 살고자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내 의지로는 세상의 유혹과 죄악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항상 기도 속에 내 자신을 쇄신하고 끊임없는 악과의 싸움 속에서 성리자로 살아가는 것이 희망이고 이상이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우리는 순교자의 얼을 본받아 굳센 믿음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자 한다. 십자가의 길 14처를 따라 기도드리고 난 후 일요일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날은 서울 잠실 본당에서 성지순례를 왔기에 순례자들로 성당 안이 가득하였다. 미사가 시작되자 두 분의 부축을 받으며 제대로 들어선 신부님은 앉아서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2003년 1월 28일 단내성지에 부임하기 전 전임지인 범계본당에서 성당건축을 한 것이 무리가 되어 건강을 잃었단다. 서툰 발음이 들리듯 말둣 하면서도 성찬예식에서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고 하실 때 반울음으로 눈물 흘리시던 모습을 보고 모두 잠깐 숙연(肅然)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 미사이고 곧 병원으로 입원하게 된다고.... 미사 후에 신부님께서는 아무리 애를 쓰도 꼭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나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사과(謝過)도 잊지 않으셨다. 나에게는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울음이리라 생각되어 이런 몸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은 또 다른 순교자의 한 모습으로 닥아 왔다.

“제가 단내성지에 부임할 당시에 단내성지는 단 돈 한 푼이 없었습니다. 후원회원도 전연 없었습니다. 게다가 순례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불과 30m 정도를 걸어도 탈진이 될 만큼 건강이 악화되어 ‘이제 내가 얼마 못살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렇게 건강도 안 좋은 몸으로 가난한 성지에 부임하고 보니 어떻게 성지를 관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믿음만이 저를 지탱해 주는 지주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성심상을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 어느 본당에서 사도직 단체 간부들이 성지를 방문하고 저에게 난생 처음 오는 성지라면서 성지소개를 부탁하였습니다. 제가 성지 개발소개를 마치자 그 중에 한 분이 ”신부님, 그러면 이 산 정상에 예수성심 상을 빨리 세우시지요,“ 라고 하시고 당시 꿈도 꿀 수 없었든 2000만원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또 서울에 사는 30대 중반의 젊은 부인은 남편이 공부원이고 지금 세를 살고 있는데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안 먹고 안 쓰고 절약을 해서 적금을 들었답니다. 얼마나 절약을 했던지 세 식구가 40만원을 가지고 한달을 살았답니다. 시장을 보러가도 남이 사고 난 찌꺼기만 사곤 했답니다. 이렇게 고생을 해서 적금을 탔는데, 그러고 나서는 부부가 의논을 했답니다.”이 돈은 우리보다 단내성지에 더 필요한 돈인 것 같네요. 건강도 안 좋은 신부님이 아무것도 없는 성지에서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우리는 그것보다 형편이 나으니 이 돈은 단내성지에 먼저 보냅시다. “ 하고 대성당 건축공사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하나하나 이렇게 해서 돈이 하나도 없는 성지에 부임해서 3개월도 채 안되는 기간에 성당 공사까지 마친 것입니다. 이글을 읽는 분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이렇게 한없이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아시고 앞으로 하느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요셉신부님의 체험담 이야기 중에서-.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순례코스를 따라 검은바위(정바오로 순교자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하며 기도했던 곳) 와 굴바위(정바오로 순교자의 가족들이 가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어 피난생활을 하던 곳)까지 약 1시간 정도의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순례를 마쳤다. 나는 두 자매님과 함께 마지막 한 무리가 되어 순례길을 가면서 순교자의 발자취를 통하여 

숨결을 느껴보고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슴에 체험해보고 싶었고 또한 찾아오리라 기대도 하였으나 그 무엇도 없었으며 박해시대 양반이란 기득권을 신앙 때문에 버리고 스스로 하느님을 증거하며 죽어간 순교자들과 그 가족들은 재산을 몰수당한 채 하루아침에 친. 인척 이웃으로부터의 또 다른 구박, 냉대, 멸시 속에 고향을 떠나 언제 잡혀 갈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 떨며 가슴조이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훌륭한 우리성조님들의 신앙심을 정바오로 순교자가 6대조인 후손 정운택 신부님이 엮은 ‘검은바위’ 책을 통하여 뚜렷한 순교의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잡혔으면 가야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데 아니 가고 어쩌겠는 가”-정은 바오로 순교자.

“정바오로의 재종손(再從孫)인 정 베드로는 재종조(再從祖)께서 잡혀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광주 영문으로 달려갔다.”나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대부(大父)를 따라 치명하러 왔으니 나도 죽여주시오. “ 두 분은 안색이 태연하시고 외양이 단정 엄숙하게 남한산성에서 여러 교우들과 함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백지사(白紙死) 순교하셨다한다.―검은 바위에서. 백지사는 죄인의 손을 뒤로 묵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서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붙여 숨이 막히게 하여 죽이는 방법이란다. 정은바오로의 두 아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오방이 성절에 산소를 모셨고 정베드로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므로 순교터의 흙을 채취해서 정은 바오로 순교자의 묘 옆에 의묘(儀墓)를 조성해 놓았다.

“집도 절도 없이 쫒겨난 바깥어른들은 외처로 피해 다니셨고, 안어른들은 백설이 덮인 뒷산 검은 바위 위에나, 옥시울(玉谷) [양지골] 안에 가서 몸을 은신하나 먹을 것이 없는 몸은 안으로 얼어들어 오고 찬바람은 살을 오려내는 것 같았다.”추위와 기갈을 견디다 못하여 밤중에 일가 규환의 집으로 찾아가, 싸리문을 제치고 들어선다. “방에서 몸이나 좀 녹이고 나가겠다.” 그러자 “아니 이제는 뉘 집안을 망치게 하려고 발길을 들여 놓는 겁니까?” 하며 모든 식구가 방에서 나와 작은 조모를 싸리문 밖으로 몰아낸다.

쓰라린 마음을 가다듬어 내키지 않는 발길로 타인인 한노수의 집으로 찾아간다.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마당에 우뚝 서 계시니 개가 죽어라고 짖어댄다. 한 노수가 방문을 열고 보니 작은 조모께서 떨고 계신지라. “빨리 안으러 들어오시라고 그래라. 밥도 데워다 드리고 새벽에는 딴 곳으로 찾아 가시도록 하여라. 하니 이렇게 고마울 대가 없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었으나 차마 나가라고 하지 못하니 그날은 윗방 구석에 숨어서 지내고 그 이튿날 일 찍 나오섰다.―검은바위 중에서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머리를 스치는 소리,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 수 있을 까? 순교자들처럼 여생을 살지는 못하여도 조금이라도 더 이 땅에서 하느님나라 건설에 투신해 보리라 각오를 다지면서 하루 일기를  닫는다.

2005년 9월 25

순교자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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