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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들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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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3-10-28 ㅣ No.393

'대선 불복' 양심 걸리지 않나, '헌법 불복' 민망하지 않나
법대로 처리하면 될 일을 불구대천 원수 굴복시키듯 해
더 나아가면 돌아올 길 없어… 與野 '통큰 정치' 보여주기를

 

이제 그만들 하셔야 합니다. 정말 그만 하십시오. 야당 대표가 대선 불복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계속 '대선 불복'이라고 몰아치는 것은, 그 말을 하고 나서도 양심에 걸리지요? 이에 대응하여 '헌법 불복'이라는 말로 내질렀지만, 그 말이 얼토당토않은 것도 아시잖아요. 보통사람들이 듣기에도 민망합니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는지 정치 관여 행위를 했는지는 검찰이 수사하여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다투고 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됩니다. 국정원 직원의 댓글을 문제 삼아 아예 국정원의 폐지나 무력화를 주장하는 것도 과했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야당도 정부를 운영해보아 잘 아시겠지만, 북한의 대남전략과 핵무장을 시도하는 호전적 태도, 그리고 오늘날 정보사회에서 피아 구별도 어려운 사이버전쟁을 직시하면, 국민의 안전과 대한민국의 안보상 국가정보기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난 정부에서 사이버 정보 역량을 강화하는 틀도 만들지 않았습니까. 국가정보기관이 불법적 사찰이나 정치 개입을 못 하게 하면 되고, 이는 국정원법이 정한 대로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될 문제를 새 정부 벽두부터 야당이 장외로 뛰쳐나간 것이나 아직 국정을 채 시작도 하지 않은 대통령에게 사과부터 하라고 윽박지른 것도 과하지 않습니까. 입장을 바꿔놓고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걸핏하면 국가원수에게 사과하라고 하면 1년에 수도 없이 사과해야 하고, 결국 그런 요구나 사과는 무게감도 없습니다.

전직 국정원장까지 기소된 현재의 결과를 놓고 보면, 일을 법대로 처리하면 될 것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대하듯 서로 무리하게 상대를 굴복시키려 한 것이 너무 심하지 않았던가요? 이것이 여야 각자 자기들의 지지자와 청중을 결집하기 위한 전술이었다면, 너무 수준 낮은 정치가 아닌가요? '정치란 한정된 자원의 정의로운 배분이다' '정치는 정치(正治)다'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올해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내놓은 지 500년 되는 해라고 국내외에서 관련 학회마다 말의 성찬이 풍성합니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현실주의로 독재를 정당화하는 길을 열어주는 위험성도 보였지만, 핵심은 자기 조국의 안전과 지속가능성과 강성함을 추구한 것에 목표를 두었고, 통치는 1인 통치도 아니고 소수가 좌지우지하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힘으로 결판 짓는 것도 정당하지 않은, 모두가 공존하는 '공화주의'적 방식이 가장 합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아니겠습니까. 정치에서 약자와 소수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지요.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공공부문 개혁, 복지 전달 체계 개혁, 부패 청산, 관료 개혁, 규제 개혁, 국가 운영의 시스템화, 고령화사회 대응, 지속 가능한 한국 사회를 위한 경제 민주화, 국가 생존 전략으로서의 교육정책, 일자리 창출, 모두가 상생하는 고용구조 등등. 대한민국에 적합한 복지제도가 무엇인지 찾는 길도 여야가 대결해야 할 문제인가요? 복지정책의 도출은 국가적·국민적 결론이기에 여야가 따로 있을 리 없습니다. 공약했다고 빚내서 복지를 할 수는 없잖아요.

 

대선 때 서로 표를 얻으려고 경쟁적으로 내지른 정책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는 아시지 않습니까? 캠프라는 데서 급조된 제안이란 게 진지하고 공개적인 논의나 전문적 검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던진 것이라는 것도 아시잖아요. 그런 공약을 지킨다고 하다가 나라가 골병이 들고 국민만 피해를 뒤집어쓰는 것도 역대 정부에서 경험했지 않았나요? 이제 이런 것 그만 하셔야 합니다.

야당도 이석기 의원 체포안에 동의했습니다. 천막도 걷고 국회로 들어왔습니다. 원점으로 돌아가 보면, 여야가 주장하던 것 중 상당 부분을 결과로 얻었습니다. 이제 냉정을 되찾고, 중국·일본·러시아에 포위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국익을 위해 힘을 합해야 합니다. '배제의 정치'를 타파하고 '공존의 정치'를 실현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행해지는 토론과 비판과 경쟁은 정치라고 할 수 있지요.

상대의 피를 보자고 하는 것, 상대를 무릎 꿇리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야만입니다. 여야가 서로 감정의 골을 깊게 파게 되면 말도 본심과 달리 험하고 천박해집니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서로 불신과 증오의 벽을 쌓게 됩니다. 모든 것은 법대로 처리하고, 서로 체면을 세워주면서 협상하고 타협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많은 과제는 여야 정치인들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들은 국민 대타협을 이끌어 내야 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논의의 장도 적극 만들어 설득과 이해를 통하여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것도 많습니다. 이제 정부와 여당은 '통 큰 정치'의 장을 만들고, 국가적 현안 해결에 야당과 머리를 맞대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면 돌아올 길이 없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 정종섭 서울대 법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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