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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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더 큰 슬픔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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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2-03-23 ㅣ No.3437

3월 24일 주님수난 성지주일-마태오 27장 11-54절

 

<슬픔은 더 큰 슬픔을 통해서>

 

몇 일 전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번잡하지 않은 낮 시간에는 각종 생필품-자동면도기, CD, 드라이버 세트, 여행용 가방 등-을 파는 분들이 자주 지나다닙니다.

 

그날은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아 보이는 한 중년신사가 생필품 세트를 팔기 위해 제 바로 앞에 섰습니다. 그분은 생필품 세트 품질의 우수성에 대해서 설명을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였는데, 자신감 없어 보이는 얼굴표정을 통해 그날 처음 나온 분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기품이 느껴지는 얼굴로 보아서 이런 일에 적합한 사람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자신감이 없다보니 그런지, 한바퀴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물건을 사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급하게 내리던 어떤 사람에 의해 팔 물건이 가득 담긴 가방이 옆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물건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가방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그분은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흩어진 물건을 주어 모으셨는데, 그 과정에서 그 분의 한쪽 팔이 마비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보기가 딱했기에 제가 다가가서 함께 물건을 담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래도 힘내세요"하고 하나를 샀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다음 칸으로 향해 가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고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슬퍼졌습니다.

 

때로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아직 먹고 살만하면서 굶어 죽어 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면서 위암 말기의 환자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은 일말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통은 더 큰 고통을 통해서, 슬픔은 더 큰 슬픔을 통해서, 좌절은 더 큰 좌절을 통해서만이 극복되고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연의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신비와 의미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고통의 치유를 위해 더 큰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 오늘 수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더 큰 슬픔을 선택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와 고통, 십자가와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예수님이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먼저 밑바닥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고통을 직접 짊어지셨고, 고난과 저주의 쓴잔을 기꺼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임종자로서의 단말마의 고통, 이국 땅에서 불치병으로 죽어 가는 서러움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받고 죽어 가는 자에게 떳떳한 동료로서의 위로와 구원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자기 삶을 저주하는 이도 누가 손을 잡고 "그대의 삶은 내게 소중하다오"하고 속삭여준다면 삶의 따뜻함과 밝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속삭여 주는 분이십니다>(김재순, 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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