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지리산 청학동 환상깨기:"에이, 청학동이 뭐 이래"

스크랩 인쇄

최성우 세자요한 신부 [john1004] 쪽지 캡슐

1999-06-09 ㅣ No.35

[동아 : 뉴스 +]■지리산 청학동 환상깨기

"에이, 청학동이 뭐 이래"

핸드폰 자가용 신식건물 둥 옛모습 잃어…아스팔트, 음식점 즐비

     

풍경 하나.

"여보세요, 청학동 이장님 댁이죠? 이장님 계십니까?"

"들에 일하러 나가셨는데예. 와 그러십니꺼?"

"몇가지 여쭈어볼 말씀이 있어서…"

"바쁜 일이신가 보네예. 그라믄 핸드폰으로 해보이소. 011-***-****"

 

풍경 둘.

아침 7시. 댕기머리를 한 학동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한복을 입은 아이, 평상복을 입은 아이들이 뒤섞여 있다. 등에는 책가방을 메고 한손엔 보조가방까지 들었다.

"너희들 어디 가니?"

"학교에 갈라꼬예."

"학교? 청학동 아이들은 서당 다니지 않니?"

"아입니더. 다 저 아래 묵계초등학교 다입니더."

"그런데 이렇게 모여서 학교 가니?"

"7시반 차 타고 갈라꼬예. 자가용 아니믄 버스타고 다입니더."

 

풍경 셋.

밤중에 갑자기 배가 몹시 아팠다. 약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민박집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청학동이라면 전해내려오는 민간요법이나 유명한 한의가 있을 것 같다 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주머니.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요 쪼매만 내려가면 약국이 있어예. 청학동 사람들도 아프믄 그집에 가서 알약 사먹는다 아입니꺼."

 

청학동.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지리산 중턱 산중마을. 푸른 학이 산다는 이상향. 50여 가구 200여명의 주민들이 전통을 지키며 사는 곳. 아직도 한복을 입고 상투를 틀고 문명과 담 쌓은 도인들이 사는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이제 청학동엔 이상향의 분위기는 없다.

 

여기저기 신식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풍스런 전통찻집들은 서울 근교 카페촌을 연상케 할 정도다. 삐죽삐죽 솟은 음식점 입간판들이 관광객들에게 손짓한다. 집앞까지 포장된 아스팔트. 이젠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청학동에 닿을 수 있다. 간간이 눈에 띄는 초가들만이 옛 청학동의 정취를 고즈넉하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TV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 대부분 보급

 

청학동을 찾는 사람들의 첫 반응은 "청학동이 뭐 이래!"라는 식이다. 열명 중 아홉명은 실망한다.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청학동을 찾은 고경동씨(부산시 부전동). "볼거리가 없어요. 식당도 많고 청학동의 트레이드 마크인 상투 틀고 한복 입은 사람보다 평복 입은 사람들이 더 많아 신비감도 없어요. 마을사람들은 물건팔기에 바쁘고…"

 

광양제철에 다닌다는 이권훈씨의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네 집앞까지 아스팔트가 깔려 청학동이라는 이미지는 푸른색이 아니라 검은색인 것 같아요. 어정쩡한 민속촌에 온 느낌도 들고요. 5년전에 찾았을 땐 그 나름대로 정취도 있었는데 많이 바뀌었네요. 점점 돈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70년대부터 매스컴을 통해 '신비한' 청학동이 알려지면서 관광바람이 불었다. 외지인들이 몰려들었다. 길이 포장되고 전기, 전화가 들어왔다. 초가지붕 위로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서고 가전제품들이 뒤를 이었다. 전자레인지 냉장고 세탁기…. 여름에도 서늘하다 보니 선풍기와 에어컨은 있을 이유가 없고 그밖에 대부분의 가전제품들이 생필품이 되어 있다.

 

청학동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한때 위기에 봉착했던 서당은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인성 예절교육이 중시되는 풍조와 함께 '청학동 서당'에 자식들을 입소시키려는 학부모도 크게 늘었다. 계절캠프로 운영되는 오는 여름방학 13박14일의 기숙 예절교육과정은 이미 마감된지 오래다. 예절교육 인기가 좋자 2, 3년전부터 서당도 급속히 늘었다. 현재는 5곳이나 된다.

 

'백두대간' '정토' '삼승산장'…. 마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상점 안내판이다. 집 집마다 자가용 한대는 기본이다. 서당 훈장님도 자가용을 타고 다닌다. 가스레인지로 밥을 짓고 기름보일러로 난방한다. 상가 앞에는 커피자판기가 청학동을 비웃듯 서 있고 그 옆엔 공중전화기까지 붙어 있다. 꽤 모양을 갖춘 상점만도 20여곳에 이른다. 장사가 잘된다는 소문이 나자 외지인들도 하나 둘씩 청학동으로 들어 왔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상점들이 늘면서 가로의 모습이 이젠 여느 대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청학동마을이 처음 형성된 것은 6·25직후.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 대도대명 다경대길유도갱정 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 大道大明 多慶大吉儒道更定 敎化一心)이라는 스물여덟자나 되는 긴 이름의 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환난을 피해 터를 일군 일종의 종교공동 체마을이다.

 

이들은 모두 흰 한복을 입고 머리를 기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옛날식으로 서당에서 훈장에게 '동몽선습'을 배웠다. 먹거리는 화전을 일궈 자급자족했다. 숯을 굽거나 약초를 캐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하동장에 내다팔아 그 돈으로 최소한의 생필품만을 사다 썼다.

 

"갈수록 상업화…보존대책 세워야"

 

그러나 지금은 평일 하루 300여명, 주말이면 500여명이 찾는 사실상의 '관광지'가 됐다. 관광객들이 몰리자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상점과 민박집을 운영한다. 관광객 유치경쟁에도 불꽃 튄다. 관광객이 청학동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민박 정했어요?"다. 하루가 다르게 가게가 늘어나고 땅값도 쑥쑥 올랐다. 마을사람들 사이에선 청학동 개발과 보존을 둘러싸고 입씨름이 오가기도 했다.

 

40년전에 이 마을로 들어와 진주암(청학동 3개마을 중 비교적 옛모습을 간직한 맨 윗동네 도인촌)에 터를 닦은 김덕준옹(73)은 "지금 청학동에 손님들이 오면 실망할 정도야. 마을사람들 도 먹고 살 길이 막막해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긴 하지만 그 모습은 말이 아니지. 옛 모습을 간직한 진주암을 민속마을로 지정하고 이미 개발된 아랫마을은 상가로 만들어 마을사람들 수입원을 만들어주는 게 최상책이야. 마을사람들도 그렇게 분리 개발되길 바라고 있어"라며 청학동의 향후 보존책을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외지 사람들이 "청학동에 돈독이 올랐다"고 말하면 청학동 사람들은 분개한다. "우리는 그럼 화전만 일구고 살란 말이냐"는 식이다. 우후죽순처럼 번지는 청학동의 상업화 물결 속에서 청학동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조금씩 싹트고 있다. 청학동을 '민족정체성 확립의 도량'으로 만들자는 것.

 

사단법인 청학서당의 박상동대표가 그 중의 한 사람. 박씨는 전체주민이 1인당 300만원씩 투자해 '서당'을 건립하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주민이 주주가 돼 이곳에서 나온 수익금을 분배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안정을 꾀해 상가를 정리한다는 복안이다. 일종의 '민족교육의 특구'를 겨냥한 복안이라고 할까.

 

청학동이 이처럼 관광지화 하면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모습에 안타까워 하는 것은 비단 이 마을 사람들뿐이 아니다. 경상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 이영만교수는 "청학동을 이대로 방치해선 안된다. 인문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탈바꿈시키는 등 뭔가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가 인정하는 서당을 만들어 옛 것을 연구하고 배울 수 있는 국학센터 또는 청소년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상업화에 몸살을 앓고 있는 청학동. 무늬마저 옛 것을 잃어버린 청학동. 어둠이 산봉우리를 타고 내려올 때 멀리서 '민박'이라는 블빛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청학동(하동)=연제호 기자  



1,080 0

추천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