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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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미사 강론] 파스카 성야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2019. 4. 20.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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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jjwriter] 쪽지 캡슐

2019-04-26 ㅣ No.129319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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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9420일 토요일[파스카 성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창세기 1,1―2,2

화답송 : 시편 104(103),1-2.5-6.10 12.13-14.24 35(◎ 30 참조)

2독서 : 창세기 22,1-18

화답송 : 시편 16(15),5 8.9-10.11(◎ 1)

3독서 : 탈출기 14,15―15,1

화답송 : 시편 15,1ㄷㄹㅁ-2.3-4.5-6.17-18(◎ 1ㄷㄹ)

4독서 : 이사야서 54,5-14

화답송 : 시편 30(29),2 4.5-6.11-12ㄱ과 13(◎ 2ㄱㄴ 참조)

5독서 : 이사야서 55,1-11

화답송 : 이사 12,2-3.4ㄴㄷㄹ.5-6(◎ 3)

6독서 : 바룩서 3,9-15.32―4,4

화답송 : 시편 19(18),8.9.10.11(◎ 요한 6,68)

7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36,16-17.18-28

화답송 : 시편 42(41),3.5ㄱㄴㄷㄹ; 43(42),3.4(◎ 4241,2)

복음 : 루카 복음 24,1-12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0323&gomonth=2019-04-20&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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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성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당

2019 4 20일 성토요일

 

1. 그 여자들은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커다란 돌이 무덤입구를 막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여정이 헛된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그 여자들의 여정은 또한 우리 자신의 여정입니다. 그것은 오늘 밤 우리가 하는 구원의 여정과 닮아 있습니다. 때때로 모든 것이 돌에 대립해 있는 것 같습니다. 죄의 비극에 대립하는 창조의 아름다움. 계약에 대한 불충에 대립하는 종살이로부터의 해방. 백성의 무기력한 무관심에 대립하는 예언자의 약속. 그렇게 또한 교회의 역사 안에서 우리 자신 개인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걸은 걸음들이 결코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너진 희망이 인생의 암울한 법칙이라고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우리의 여정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무덤의 돌에 대립해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한 구절이 그 여자를 놀라게 하고 역사를 바꿉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복음 24,5) 어찌하여 모든 것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아무도 너 자신의 무덤의 돌을 치울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체념이나 실패에 굴복하느냐? 형제 여러분, 부활절은 치워진 무덤의 돌을, 이미 굴러져 있는 돌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희망과 기대에 충돌하는 가장 단단한 돌을 치워 주십니다. 죽음, , 공포, 세속성. 인류 역사는 무덤의 돌 앞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그 인류 역사는 살아 있는 돌” (베드로의 첫째 서간 2, 4 참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그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낙담하게 되고 우리 실패의 빛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때조차도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려고 오시고 우리의 모든 실망을 뒤엎어 버리시려고 오십니다. 우리 각자는 오늘밤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마음의 돌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돌을 치우시는 한 분을 다시 발견하라고 부름 받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렇게 물읍시다. 내가 치워야 하는 돌은 무엇인가. 이 돌의 이름은 무엇인가?

 

자주 희망을 막는 것은 좌절이라는 돌입니다. 한번 우리가 모든 것이 나빠지고 있고 일들이 더 나빠질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낙담하고 죽음이 생명보다 강하다고 믿게 됩니다. 우리는 냉소적으로 되어가고 부정적이고 의기소침해 집니다. 돌 위에 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우리 자신의 불만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 희망의 무덤. 인생은 불평의 연속이 되고 우리는 영적으로 병들어 갑니다. 일종의 심리적 무덤이 점령합니다. 모든 것이 거기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그 기념비 앞에서 우리는 부활절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다시 한번 듣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주님께서는 체념 속에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그분을 찾지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태오 복음 22,32). 희망을 묻어버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자주 닫은 채로 봉인하는 또 다른 돌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돌입니다. 죄는 유혹합니다. 그것은 빠르고 쉬운 것들을 약속하고 번영과 성공을 약속하고 그러나 그리고 나서 고독과 죽음만은 뒤에 남겨 놓습니다. 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생명을 찾고 있고 사라져 가는 것들 안에 있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어찌하여 하느님의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네 마음의 입구 앞에 있는 돌 같은 저 죄를 버리기로 마음 먹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참빛(요한복음 1,9 참고)이신 예수님보다 반짝거리는 부와 성공과 자만과 쾌락을 더 좋아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더 이상 이 세상의 공허한 것들 것 아니라 생명이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말하지 않느냐?

 

2.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그 여자들에게 돌아 갑시다. 그 여자들은 굴러져 치워진 돌 앞에서 당황하여 서 있었습니다. 천사들을 보면서 그들은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루카 복음 24,5). 그들은 올려다 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우리가 같은 일을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결점들 앞에서 움츠려 있기를 더 좋아하고 두려움 안에서 웅크리고 있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인데 그러나 우리가 왜 이렇게 합니까? 주님께 우리 자신을 열기 보다는 우리 마음의 어둠 안에 홀로 머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고 침울하게 우리 자신 안에 갇혀서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자신하는 일이 드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홀로 그분만이 우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한 시인은 한때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높이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일어나라고 부름 받을 때까지”(E. Dickinson). 주님께서 깨어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일어나라고, 올려다 보고 우리가 땅이 아니라 하늘 나라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심해의 죽음이 아니라 높은 곳의 생명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분께서 보시는 대로 삶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억누를 수 없는 아름다움의 핵심을 보기를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회복될 아들과 딸들을 죄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다시 태어날 형제 자매들을 죽음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다시 활력을 되찾을 마음들을 처참한 고독 안에서 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를 두려워하고 그것을 떠안기를 두려워할 때조차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사랑하십니다. 부활절에 그분께서는 그분이 삶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당신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것을 온전히 살아내시기까지, 피땀 흘리심을 겪으시기까지, 버려지심과 죽음과 저승을 겪으시기까지,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승리히신 모습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신뢰를 나에게 두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비탄을 춤으로 (시편 30, 12 참고) 바꾸시는 것에 전문가이십니다. 우리는 또한 그분과 함께 파스카(a Pasch), , 과월제(a Passover)-자기 중심에서 친교로, 고독함에서 위로로, 두려움에서 확신으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고 있지 맙시다. 그분의 눈길은 우리를 희망으로 채우십니다. 그 눈길은 우리가 틀림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우리가 아무리 많이 망쳐 버려도 그분의 사랑은 변함 없으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한가지 확신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봅시다. 내 삶에서 나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나는 무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살아계신 분을 찾고 있는가? 

 

3.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 여자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천사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루카 복음 24,6). 그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갈릴래아에서 있었던 그분의 부르심을 기억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희망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살아 있는 기억을 잃어 버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무덤을 보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항상 갈릴래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첫사랑과 그분의 부르심을 다시 되살려야 합니다. 그분을 기억하고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몸을 다하여 그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살아 있는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신앙은 부활 신앙이 아니라 박물관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유명인사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살아 계신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역사 책을 통해서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 우리는 삶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맨 처음 어떻게 부르셨는지, 그분께서 우리의 어둠, 우리의 저항, 우리의 죄를 어떻게 이기셨는지,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말씀으로 어떻게 어루만지셨는지 오늘 기억합시다.

 

형제 자매 여러분, 갈릴래아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그 여자들은 무덤을 떠났습니다. 살아계신 분이신 그분을 만나러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름 받기에 믿는 이들은 무덤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고 부활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봅시다. 내 삶 안에서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떄때로 우리는 많은 우리의 문제들만을 향해서 가고 오로지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께 갑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필요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 계신 분을 찾고 있습니다. 또는 다시 우리가 한때 주님을 만나고 나서도 얼마나 자주 부활하신 분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면서 후회와 비난과 상처와 불만들을 파내면서 죽은 이들에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삶의 중심에 살아 계신 분을 모십시다. 우리 문제들의 바다, 그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죄의 모래톱에 좌초되거나 좌절과 두려움의 암초에 부서지지 않도록 은총을 간구합시다. 그분을 찾읍시다. 우리 자신을 그분이 찾으실 수 있게 놓아 둡시다. 모든 것 안에서 그리고 모든 것을 넘어서 그분을 찾읍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되살아날 것입니다.

 

강론영어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documents/papa-francesco_20190420_omelia-vegliapasquale.html



*소리로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심쿵 미사 강론 -> http://www.podbbang.com/ch/1771273

   -> 교황님 미사 강론 번역문을 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들으실 때 로그인이 필요 없습니다.

        많이 와서 들으시고 번역문을 보기 어려우신 분들께 많이 소개해 주세요. 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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