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워서 퍼온글-님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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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희 [sansan] 쪽지 캡슐

2001-02-01 ㅣ No.2588

우연히 홈페이지들을 돌아다니다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허락도 안받고 퍼온 글이랍니다.

읽고나서의 책임은 저도 안집니다.

제가 퍼온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

수녀가 되고나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왜 수녀가 되었느냐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한번도 적절한 대답을 해준적이 없고,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며,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묻는 질문입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아무래도 많은 분들은 저같은 사람들이 왜 수녀가 되었을까? 이 수도생활의 의미는 무엇일까?가 정말 궁금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척이나 어려운 대답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제 이야기를 듣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조금 더 바란다면 수도생활에 대한 갈망은 있으나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나눠 드립니다.

 

언젠가 그냥 써놓은 이 글에, 이시간 <님과 나>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1.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교회에 가고 싶었다.

13살 다 자라지 않은 시골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저 건너편에 있는 교회에는 왜 가고 싶었는지......

하지만 그곳은 동경과 아쉬움의 세계일뿐, 지극히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가진 옛선비의 집안으로, 때가 되면 사주팔자를 보고,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는 우리집 분위기에서 예수는 단지 서양 신에 불과했다.

 

2.

광주로 학교를 다니게 됨은 나에게 동경의 세계를 현실로 접목시켜 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 내짝궁 미숙이는 지금도 내게는 잊을수 없는 친구다.

가난했지만 소박하고 사랑스러웠던 아이 미숙이는 내게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었다.

나는 미숙이를 따라 주일이면, 도서관을 간다고 집을 나와 교회를 찾게되었고 세례를 받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살아있는 하느님. 나를 가슴뛰게 했던 하느님, 인간의 가치와 행복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던 하느님 이셨고 내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 준 하느님 이셨다.

당시 나의 종교적 열성은 3분 스피치 시간에 친구들 앞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부르짖고 우리들의 선행을 호소할 정도였다. (지금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아무튼 하느님은 참 재미있는 분이시고 너무나 계획적이고 얄밉기 까지한 분이시다.

 

3.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의 부모님을 나를 잠깐 광주 언니집에서 지내게 했는데, 그 언니는 얼마전 가톨릭 신자인 형부와 결혼을 해 세례를 받고 레지오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 언니가 내게 사정을 했다.

"명희야! 내가 새롭게 레지오라는 걸 하게 됐는데, 그게 말야. 실적이라는게 있어야 한 대."

"실적! 성당에도 그런게 있어!"

"응! 그게 말이지. 사람들을 성당으로 데려와야 한 대나봐."

"그래서....."

"한번만 함께 가주라. 한번이면 돼."

 

한번이라는 말에 따라 나섰던 그 한번은 출석점검 한번만으로 바뀌었고, 한번만이 몇차례 계속되면서 나는 개종마저도 한번만!에 걸려든게 아닌가 싶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 한번만의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내게 있어 하느님은 삶의 길잡이 이면서 가치 그 자체였고, 성당에서 역시 행복했다.

 

4.

그날은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주경야독에, 나이에 맞는 데이트에 일요일이면 바쁘던 그 시기에 왜 그 주일만은 할 일이 없었고, 읽지도 않던 주보에는 왜 눈길이 갔는지......

따분한 빈날에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수녀원에 가보는 것이였다.

생각없이 간 모임은 성소자 모임이였고, 나는 수녀가 된다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쁘게 사는 모습, 나를 사로잡는 편안함, 친절, 그리고 그 혜택을 기쁘게 누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 초등학교때의 꿈은 고아원 원장이였다.

 

5.

딸을 둔 모든 어머니는 그러는 걸까!

 

지금도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지울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영상은 대문앞에 서서 저멀리 버스정류장을 바라다 보시며 내가 버스를타야만 뒤돌아서시던 모습이다.

내가 수녀원을 선택했을 때 아무것도 나를 붙잡지 못했지만,

단하나. 가장 가슴 아팟던 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가족들이 하나둘 신자가 되면서 어머니도 신자가 되셨는데, 수도생활을 이해할 수 없으셨기에 하느님이라는 그 무서운 존재앞에서, 신자가 된걸 얼마나 후회를 하셨는지 모른다.

어르고 달래도, 화를 내시고, 눈물로 호소를 하시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다시 한번 그런 아픔의 시간이 온다면 나는 아마도 어머니를 위해 성소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때는 어떤 힘의 작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성소가 무엇이길래? 아니 자식이 무엇이길래? 엄마와 나는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열병을 6개월을 앓다가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엄마가 져 주셨다.

"그래. 원풀이나 하거라. 하지만 딱 1년이다. 1년후엔 내가 살기를 원한다면 돌아와야 한다."

나는 1년만 살다 오겠다는 각서를 썼고,

입회하던날 어머니는 한가지 목적을 위해 서울 수녀원까지 따라오셨다.

"원장 수녀님! 우리 명희는 그냥 1년만 와본겁니다. 1년후는 어떤일이 있어도 보내주셔야 합니다."

굳세게 울음만은 참으시던 엄마가 수녀원 언덕을 내려가시면서 엉엉 울음을 터트리셨다. 마치도 아이처럼--

 

야간대학을 다니던 나는 4년동안을 늘 막차로 다녔다.

우리집은 도로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었는데, 초저녁 잠이 많으셨던 어머니셨지만 늘 11경이면 눈이 떠진다 하셨다. 발자국 소리가 나면서 대문을 밀고 "엄마!"하고 내가 들어서면 엄마는 자동적으로 "그래!"하며 방문을 여시곤 했다.

졸업을 하고 이틀만에 떠나버린 딸 때문에 엄마는 여전히 11시만 되면 어설프게 든 잠이 깨셨다고 ...... 막차가 지나가고 우리집 앞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엄마는 대문 미는 소리가 들리는지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세우셨단다. 그 발자국 소리들이 지나쳐 가버리면 자동적으로 눈물이 나오셨다고.........

엄마는 1년동안을 대문을 잠그지 않고 사셨다. 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에.....

아니 딸이 떠난 사실이 적응이 안되었기에..... 하지만 나는 수녀원 생활이 너무 행복해 엄마의 한숨을 잊고 살았었다.

 

6.

늘 그렇다. 늘-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딸이지만, 딸이 원할땐 늘 져주신다.

1년이 2년이 되게 기다려 주셨고, 다시 3년을......

나는 서원식때 너무나 행복했다.

서원 미사때 내내 행복해서 서원문 낭독때는 다른이들은 가슴이 떨렸다지만 나는 마냥 행복해 서원식 낭독도 우렁차기만 했다. "드디어 주님의 것이 되는구나. 하느님 감사합니다."

미사가 끝나갈 무렵 축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려 돌어서는 순간! 손수건이 다 젖도록 차마 고개를 못들고 울고계시는 엄마를 보았다.

"엄마 용서하세요. 하지만 정말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릴께요."

나를 7년째 기다리시는 엄마. 지금도 늘 걱정이시다. "혹시 내가 너 돌아오길 기다린다 해서 수녀님들이 미워하시지는 않냐?"

 

7.

나는 지금 행복하다.

어머니가 주시는 사랑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13살 아이에게 찾아와준 하느님, 친구를 보내 불러주신 하느님, 언니를 통해 나를 유혹해 주신 하느님, 그리고 그렇게도 우연을 가장해 수녀로 불러주신 나의님이 계시기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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