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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채드윅 감독의 <천일의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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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08-04-06 ㅣ No.982

  
영화 포스터
ⓒ 스캇 루딘 프로덕션
 

 

'나쁜 남자' 헨리 8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괴팍하고 기묘한 군주로 평가된다.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죽은 형의 미망인, 즉 자신의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고 나중에는 그녀와의 결혼을 취소하기 위해 국교까지 제멋대로 바꾼 망나니 군주였다. 또 여자가 싫증나면 마치 액세서리처럼 교체하고 자기 마누라를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엽기적인 호색한이기도 했다.

 

요즘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패륜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에서 '왕'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지엄한 품위는 간 곳 없이, 문명과 동떨어진 야만인이자 본능에 충실한 수컷의 탐욕이 보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헨리 8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전제군주이자, 그의 친딸이며 잉글랜드의 최전성기인 '골든 에이지(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가장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운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조명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연산군이나 장희빈, 중국의 양귀비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헨리 8세의 일대기와 여성편력을 둘러싼 스캔들은 서양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대중문화의 소재로 차용되고 있기도 하다. 잉글랜드 궁중사는 최근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튜더스-천년의 스캔들>나 영화 개봉작 <엘리자베스> <골든 에이지>등을 통해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

 

헨리8세를 그린 영화들의 공통점

 

헨리8세를 논하는데 화려한 여성편력을 빼놓을 수 없다보니, 그를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관능적인 에로틱 코드를 앞세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TV 시리즈 <튜더스>와 <천일의 스캔들>을 잇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의 한 장면
ⓒ 스캇 루딘 프로덕션
 

실제 역사 속 헨리8세는 덩치가 크고 뚱뚱한 거구여서 꽃미남과는 거리가 먼데다, 변덕이 심하고 다혈질적인 인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헨리 8세를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그를 남자답고 호방하며 섹시한 캐릭터로 묘사한다.

 

가만히 있어도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만한 인물로 그려내는 것. 하긴 파격적인 궁중 스캔들을 그려내야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나오고 아저씨 타입의 호색한 주인공은 대중들에게 매력적일 리가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다.

 

<튜더스>의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나 <천일의 스캔들>의 에릭 바나가 연기하는 헨리8세는 이기적이고 위험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나쁜 남자'다. 두 작품 다 궁중야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로맨스뿐 아니라 헨리8세 시대의 정치적 갈등과 사회 변화까지 입체적으로 조명한 <튜더스>에 반해, <천일의 스캔들>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헨리 8세와 앤-메리 자매를 둘러싼 파국적인 삼각관계에 초점을 맞춘 격정 로맨스에 좀 더 가깝다.

 

TV판을 먼저 접한 팬이라면 드라마에 못미치는 <천일의 스캔들>의 섹시코드나 캐릭터 구축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특히 여성 관객이라면 극중 여성에 대한 시대착오적이고 편향적인 묘사에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영화에선 헨리8세 본인보다는 여자 주인공인 앤(나탈리 포트만)과 메리(스칼렛 요한슨) 자매의 애증과 갈등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적인 시선'에서 다루어진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전근대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자아를 갈망하던 여성들이 남성의 정치적·성적욕망 앞에서 어떻게 좌절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헨리8세의 입체적 모습 기대하기 힘들어

 

시간상 제약을 받아, '선택과 집중'이 요구되는 스크린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천일의 스캔들>은 삼각관계의 애증 자체에만 주력하다보니 등장인물들의 복잡다단한 욕망과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해 아쉽다. 16세기 잉글랜드를 완벽하게 재현한 듯한 화려한 영상과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물들의 감정변화에는 설득력이 부족해보인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천일의 스캔들>에는 정상적인 인물이 한 사람도 없어보인다.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진심어린 애정공세를 펼치는 듯 하던 헨리8세는 후반부로 갈수록 음탕한 본색을 드러내는 바람둥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캐릭터에 머문다. <튜더스>에서 그나마 간간이 드러내던 정치적 과단성과 호방함이 배제된 채, 철저하게 여자 관계만 조명되다보니 헨리8세의 입체적인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사실상 극전개를 이끌어가는 두 여자주인공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믿었던 사랑에 배신당하며 신파극의 주인공이 되는 순진한 메리는 물론, 세 인물 중 가장 현실적이고 당당해 보이던 앤 조차 나중에는 동생의 비극을 외면하고 왕의 사랑을 얻기 위해 집착하거나 오직 자신의 권력욕과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발버둥쳐, 갈수록 삼류 치정극에 기우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그 주변인물들도 권력을 위하여 자신의 딸을 정략적으로 희생시키거나, 타인의 불행에 무관심한 이기적인 인물들로 묘사된다.

 

선정적 스캔들 재구성 수준에 그친 <천일의 스캔들>

 

  
영화의 한 장면
ⓒ 스캇 루딘 프로덕션
 

 

<천일의 스캔들>의 이런 편향적인 스캔들 묘사를 어디까지 픽션으로 받아들여야할까. 헨리8세의 여성편력에는 단순한 '원 나잇 스탠드'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신의 대를 이을 왕자를 생산하기 위한 정치현실도 관련되어 있었다. 영화 속에서 비교적 순수한 인물로 그려지는 메리가 실제로는 헨리8세 못지않게 염문설에 자주 휩싸였었다. 국중에서 앤은 왕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아예 권력만을 탐하는 팜므파탈로 묘사된다.

 

인물들의 성격묘사가 이처럼 조금씩 엇나가있다보니,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헨리8세와 두 여성간의 사랑도, 자매간의 애증도 분명히 그려내지 못하고 선정적인 스캔들을 가십 그 자체로 재구성하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만다.

 

무엇보다 역사적 고증을 지나치게 왜곡한 채 마치 파파라치처럼 자극적인 요소만을 부각시켜 파국으로 치닫는 극중 전개는, 그 시대에 대한 창의적인 재발견도, 새로운 캐릭터의 구축도 제시하지 못해 실망감만 준다. <트로이>의 바나와 <스타워즈>의 포트만, <진주귀걸이 소녀>의 요한슨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을 보면, 멀쩡한 배우들을 사이코로 만들어버린 빈약한 연출력과 시나리오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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