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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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4, 43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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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3-11 ㅣ No.170490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4,49~50)


사순시기에 들어 처음으로 요한복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순 제4주간 월요일인 오늘부터 성주간 화요일까지 줄곧 요한복음이 평일 미사의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서술상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공관복음과 매우 다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공관복음은 대략 1년에 해당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3년의 공생활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예수께서 3번이나 예루살렘에서 과월절 축제를 지낸 기록(2,13; 6,4; 12,12)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은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20,31)이며, 이 목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적 활동이 곧 복음서의 주제인 셈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약 26Km 떨어진 가파르나움에도 가시지 않고 멀리서 치유 기적을 일으키신 내용이며, 요한복음이 보도하는 혼인 잔치에서의 포도주 기적(2,1-11)에 이은 두 번째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왕실 관리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의 앓는 종의 치유를 간청한 백인대장과 같은 인물로 추정됩니다. (마태 8,5-13; 루카 7,1-10 참조) 백인대장의 믿음과 같이 황실 관리의 믿음은 어떤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은” (요4,48)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믿음과 대조를 이룹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마태 8,10) 하고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던 것처럼, 고향 사람들과 달리 당신의 말만 듣고서도 믿고 떠난 황실 관리에게도 동일한 칭찬을 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한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만납니다. 이런 부성애나 모성애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그들의 딱한 처지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은 것도 우리 역시도 언제 그런 어려움과 아픔을 겪었기에 혹 겪을지 모르는 동질감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의 이방인인 왕실 관리 역시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아들만 살릴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못 할 것 없는 부성애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카파르나움에서 카나까지 전혀 짧지 않은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 주십사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예수님의 태도는 냉담하십니다. 마귀 들린 딸의 치유를 간청한 가나안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첫 반응처럼(마태15,21~28) 그리고 왕실 관리에게 들어보아라는 듯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4,48)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은 물론 유다에서 만난 사람들의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선입견과 편견이 못내 가슴 아프셨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파견된 의도와는 달리 표징과 이적만을 요구하고 보려는 사람들의 좁고 닫힌 마음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왕실 관리를 통해 분출하신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아들을 둔 그는 여타의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태도가 다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표징이나 이적이 아니라 다만 아들의 생명을 살릴 힘이 필요했습니다.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의 불편한 심기로 가득 찬 냉정한 말씀을 뛰어넘어섭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4,49) 그는 비록 왕실을 관리하는 고관이었지만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일념에 주님의 조금은 부정적인 말씀에 연연하지 않고 주님께 이렇게 간절히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왕실 관리의 마음을 헤아리신 건지 아니면 건성으로 응답하신 건지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4,50)라고만 하실 뿐, 왕실 관리가 그토록 간청한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거절한 듯 혼자 가거라, 라고만 하십니다. 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 직접 내려가시어 아들의 병든 몸에 손을 얹어 치유해 주셨으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함께 내려가시겠다는 말씀은 없으시고 그저 한 말씀,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도전입니까? 그럼에도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혼자 내려갑니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지 못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마치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5,5)라고 했던 베드로처럼 그 왕실 관리는 확인하고 싶은 애절한 마음을 접고 그 말씀만을 믿으며 행동으로 그것을 실천합니다. 참되고 용기 있는 믿음은 축복을 거두어 드립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왕실 관리에게 있어서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를 믿고 찾아와 아들의 치유를 간청하였으며,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신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왕실 관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신과 왕실 관리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목격자를 향한 말씀이며, 더 나아가 오늘 복음을 읽고 들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왕실 관리가 집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을 통해서 아들이 살아났다, 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물었고,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4,52)라는 대답을 듣고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떠 올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다시 살아난 이유를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압니다. 아들이 살아난 것은 물론 예수님의 능력이지만, 모든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었던 왕실 관리의 믿음과 그 믿음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에게 자신의 고정관념을 뛰어넘고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힘이었습니다. 왕실 관리의 자식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과 그의 진심이 이루어 낸 믿음의 승리입니다. 이 일로 인해 왕실 관리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모두 믿게 되었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오늘 왕실 관리의 믿음에 따른 치유의 기적은 단지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비록 같은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기도의 고리를 통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의 행동입니다. 사실 많은 유대인이 그랬듯이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불신의 표현입니다. 오히려 왕실 관리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의할 때, 비록 다른 장소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필요한 사람의 치유를 일으키리라 믿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Abba의 노래 「I have a dream.」의 한 소절을 인용합니다.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내게 알맞은 때가 오면, I'll cross the stream 나는 강을 건널 거예요, I have a dream 내겐 꿈이 있어요.』 그래요.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빠 하느님의 큰 꿈에 초대받고 있기에, 언젠가 그때가 되면 “다시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함께 춤추며 노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 주실 것이다.”(이65,19,17)라는 약속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기에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한 카나로 다시 내려가셨고, 처음과는 달리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화답송 후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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