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EBS 지식채널e 바보의사 1&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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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son1148] 쪽지 캡슐

2011-02-18 ㅣ No.1425

 

2부

 

 

 

 

 

 

 

 

 

 

 

 

 

"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왜 아픈 사람을 일컬어 환자라고 하는지 아나?

환(患)은 꿰맬 관(串) 자와 마음 심(心) 자로 이루어져 있다네.

상처받은 마음을 꿰매야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네.

다시 말해 환자란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줄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눈에 보이는 상처는 치유하기 쉽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네.

자네가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환자의 마음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 하네"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신혼시절의 어느 날이던가

나는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아내는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어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아내의 모습을 바라다 봤지

그때 마침 아내도 나를 쳐다보는 거야

아내의 고운 눈빛이 잔잔하게 내게로 향했지.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

그런데도 그 눈빛에서 영원을 느꼈어....

아..........

저 사람과 나는 영원히 함께 하는구나....하는...그런 느낌...

그 뒤로는 단 한번도 아내 외의 여자를 생각해본적이 없었지"

 

 

 

성산(聖山) 장기려 (張起呂) 박사 (1911년 8월 14일- 1995년12월 25일)

 

 

 장기려 선생님은 191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유복한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할머니의 사랑속에서 별탈없이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선생님의 부친께서  직접 설립한 의성학교를 다녔습니다.

 

의성학교를 졸업후 송도보고를 거쳐 ,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준 할머니를 떠올리며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경성의전에 입학합니다..


" 옷이라는 건 말이다, 네 몸의 온기를 가두어두는 것일 뿐이란다.

옷 자체가 따뜻한 건 아니잖느냐.

그런데도 우리가 옷을 입으면 따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옷이 네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허공으로 헛되이 흩어져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결국 온기를 지닌 건 바로 너 자신이란다. 옷 때문에 따뜻한 게 아니고

사람은 원래 그렇게 따뜻한 존재로 이 세상에 나온 거란다.

.....

 기려야, 너는 옷을 여러 번 껴입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옷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 할머니는 네가 다른 사람들의 옷이 되어줬으면 싶구나.

 다른 사람들의 체온을 지켜주는 옷처럼

늘 사람들 곁에 머무는 그런 사람이 되어준다면 더 바랄게 없겠구나."

 

 1932년 경성의전을 졸업후 당시 국내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선생의 조교로

경성의전 외과에 근무하며  맹장염을 일으키는 세균에 대한 논문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를 완성했고,

1940년에는 이 논문으로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48년에는 북한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경성의전의 교수직을 물려주려는 스승의 제의와

의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부와 명예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마다한 채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송도고보 시절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경성을 떠나  스승이 소개해준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에서 의사로서 첫출발을 하게 됩니다...

 바쁜 병원업무속에서도 빈민촌을 돌아보며 무의촌 진료를 시작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팔을 걷어부쳤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선생님의 부인은  그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1951년 부산 남항동 무료 '복음병원' 시절

 

 

해방을 맞았으나  나라는 곧 이념에 의해 분열되었고  3ㆍ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렸습니다. 

그런 혼돈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켰고,

오직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뒤덮던 고통에서 그 역시도 예외일수는 없었습니다.

해방후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던 중

전쟁이 일어났고 잠시를 기약하며 둘째 아들 가용(張家鏞·전 서울대 해부학과 교수)과

  함께 올랐던 피난길은 그대로 가족들과 생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망연자실하던 그는 의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피난민들이 들끓는 부산에서

다시 자신의 서원을 떠올렸고, 어느새 의사로 돌아왔습니다.

진료소를 세운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고,

무의촌 진료도 계속했습니다.

 

 

 

 

박애와 헌신의 삶을 살았던 선생님은 한국의 의학발전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일제강점기 기홀병원 재직시에 일본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간 설상절제수술을

처음으로 성공했던 그는 1959년 국내 최초로 간에서 암세포를 잘라내는 수술과

이후 간 대량 절제 수술에 처음으로 성공하였으며

대한간학회는 이 날을 기념해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정했습니다.

또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 의료보합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 부담을 낮춰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을 이용해 개인의 성공이나 부, 명예를 좇으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낮은 곳으로 임했고, 늘 병든 환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항상 선생님의 머리맡에 놓여있었던

부인 김봉숙 여사의 젊은시절 모습과 훗날 80대 모습을 담은 사진2장
 
 

 

''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

 

'' 나는 안타까울때마다 아래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릅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오려나

썩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때에 오려나

일구원심 나의 맘에 그대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오려나'

안만 말하여도 안타깝기만하여 이만하고

당신과 기용이네 가족이 건강하여 만나게될 그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으며

부디 옥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또 바라옵니다''

 

장기려 선생님의 부인께서  보내신 편지 中

 

선생님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45년을 홀로 살았습니다.

그의 주위 사람들은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늘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 하며.  

 민족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었습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을 때.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되자, 정부에서는 사회 문화계 인사들에게

특별히 가족 상봉을 주선하며 장기려 선생에게도 제안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는 함께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라고,

다른 이산가족들과 떳떳이 고향을 찾겠다 거절하며

아내에게는 편지만 보냈다고 합니다.

 

 

평생을 상봉하지 못했던 선생님부부의 사진을 북에 있는 손녀가 컴퓨터로 합성해서 보내줌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

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후에도 가족상봉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이 땅의 이산가족들이 모두 상봉을 이룬 후에 만나겠다"며 거절했습니다.

 . 결국은 평생 그리던 아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자신의 욕심을 끝까지 버렸습니다.

개인적 기쁨과 행복조차도 혼자 독점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은 은퇴가 없는 일생으로.

만년에도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이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세민 환자들을 돌보며,

왕진을 청하는 환자들의 요구를 단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일화는 수없이 많습니다.

가난한 환자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내 주기도하고,

입원비 낼 여력이 없는 환자를 몰래 도망치게 해주기도 하고,

며느리가 혼수로 해온 이불을 춥고 배고픈 고학생에게 건네 주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천한 사람 귀한 사람없이. 누구든지 존귀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깊은 애정과 연민의 정으로 대한 선한 의사였던 그는.

가난에 멍든 우리네 서글픈 이웃들에게 소금 같은 존재였으며

 서러운 풀잎들에게 한없는 희망을 안겨준 거룩한 영혼이었습니다.

 

 

 

그의 회갑날 함석헌(咸錫憲) 선생님께서   

"장 박사가 어디 능력이 있어서 일을 하나, 욕심이 없으니 다 되는 거지." 라고 하시자

 그는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소의 기쁨이긴 하나,

그러나 죽었을 때 물레 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아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아직은 급제했다는 생각이 안 들어

부족을 느끼면서 살고 있지요.”

 

 

 

 

 무사무욕의 삶을 실천한 사람.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집 한 채는커녕 통장에 달랑 천만 원을 남겨 놓았고,

그마저도 간병인에게 줘 버리고 빈손으로 떠나갔던 사람,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죽는날까지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부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의 인술과 생명, 평화의 정신은

장기려 선생님의 전 생애를 엮어간 키워드였습니다. 

 

 한 평생을 가난한 환자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인술과 사랑을 실천한 그에게

이 사회가 드려야 할 명함이 있다면 바로 '성인(聖人) 장기려(張起呂)'입니다.

 

 

 

"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

우리는 자진해서 사랑하자

그러면 사랑을 받는 자보다 더 나은 환희로 충만하게 되리라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목숨을 아끼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잘 죽는 자가 잘 사는 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다

생명은 죽음에 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도리어 열심히 이 죽음의 길을 찾을 것이다."

 

글출처: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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