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그분"이 불러주셔서--루브르 박물관에서 (여덟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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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항 [vinchen10] 쪽지 캡슐

2004-12-06 ㅣ No.427

넘치는 "그분"의 사랑

주 예수님, 당신의 일을 행할 수 있게 저의 손을 바칩니다.
당신의 길을 갈 수 있게 저의 발을 바칩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볼 수 있게 저의 눈을 바칩니다.
당신의 말을 할 수 있게 저의 혀를 바칩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서 생각하실 수 있게 저의 정신을 바칩니다.
제 안에서 기도하실 수 있게 저의 마음을 바칩니다.
무엇보다,당신께서 제 안에서 당신의 아버지와 전 인류를 사랑하실 수 있게 저의 가슴을 바칩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서 살며 일하고 기도하는 분이 오직 주 예수님 당신일 수 있게 저 자신을 온전히 바칩니다. --오상의 성 비오신부님
* * * *

  빛의 도시라고 자칭하는 파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기원 전 이곳에 살던 갈리아족의 부족인 파리시이(Parisii)에서 따온 파리라는 이름은 3세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지요. 중세 시대까지 파리는 좁은 골목과 지저분하고 음침한 주거환경으로 밤에는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슬럼가 모습이었답니다.

  19세기 나폴래옹3세 때 오스망이라는 시장이 빈민가를 정비하면서 주민들을 시 외곽으로 이전 시키고 도로를 직선으로 확장 정비하고 주택을 일률적으로 20미터의 높이에 건물 하나하나를 시에서 심사했다지요. 건물마다 똑 같이 지을 수 없게 하면서 오늘 파리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다운 도시경관을 이루었다지요.

  대개 5층 높이의 건물은 1층은 상점, 2층은 넓은 발코니의 주택, 3,4층은 좁은 발코니의 좀 떨어진 주택이며 제일 꼭대기 층은 넓은 베란다를 두어 분양에 힘든 점을 해소하여 쾌적한 조망과 환기가 잘 되는 주택으로 만들었답니다. 우리나라 말로 5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은 엇비슷해 보이지만 하나하나 뜯어 보면 어느 하나 똑같이 생긴 모습은 찾아 볼수 없네요. 건물 외장 색갈도 시정부에서 간섭한답니다.

  유감인 것은 유명한 파리의 지하 하수구와 지하 운하를 못본 게 섭섭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나오는 잔발장과 마리우스가 피신하는 장면에 파리 시가밑으로 거미줄같이 뚤린 지하 하수도가 등장하지요. 물론 세계각국의 도시계획 담당 공무원과 학자들이 꼭 견학하는 명소이지만 저는 젊은 시절에 감동을 받은 세계명작의 현장에 서보고싶은 탓이지요. 오스망이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인가 봐요, 땅 위로 밑으로 꼼꼼하고 치밀한 도시계획을 실행 해낸 오스망 시장을 파리지앤느들이 존경한다네요.

  오늘의 파리, 세계에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오는 곳, 한사람의 천재 오스망, 정정하지요. 파리를 사랑하고 지켜냈던 빅토르 위고, 스탕달, 지드, 쟝 꼭도와 이브몽땅과 모리스슈발리에, 그리고 쟝 가방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인과 샹송가수, 영화배우 등 예술가들이 쌓아 올린 금자탑처럼 파리는 빛나고 있는 거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이 도시를  "빛의 도시" 라고 부른답니다.

  언듯 보면 오래된 구닥다리 건물만 있는가 했는데 파리 외곽 라데팡스에는 현대식, 아니 초 현대식 감각의 건물이 단지를 이루고 있는데 지나면서 보았습니다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건 뭐 사람이 들어가 살고 있는 건물이 아니라 미적 감각만 살아 있는 듯 보이나 많은 기업과 공공기관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오피스기능 또한 훌륭한가 봅니다. 저 또한, 역시 프랑스구나 하고 감탄할밖에요. 고전과 초 현대적인 예술의 만남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또한 실용과 순수예술의 어울림도 시내 곳곳에 남아 있지요. 지금 가고 있는 루브르, 고전의 본산에 초 현실주의 작품인 유리피라미드가 그 한복판, 루브르궁 정원에 자리잡고 있는 걸 봐서도 알 수 있겠지요.

  개선문을 중심으로 넓고 직선으로 뚫린 도로가 방사선 모양으로 퍼져나가는 도시설계는 파리의 명물이지만 원래 파리혁명 이후 시민들의 잦은 봉기를 막기 위한 군사적 치안유지의 목적으로 그리 계획하였답니다. 그러나 잘 닦여진 이 도로를 통해 히틀러의 독일군이 진입하는데 수월했다네요. 독일군은 파리를 훼손하지 않았지만 퇴각할 때 히틀러가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그러나 당시 파리주둔 독일군 사령관이 명령을 어기고 철수하는 덕에 파리는 오늘날에도 유서깊은 유적과 인류문명의 보고를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감회가 깊었습니다. 물론 연합군도 파리에는 절대 포격을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얼마전 아마겟돈이라는 영화에서 지구로 떨어지는 혜성의 한 파편에 맞았을뿐인데 파리 개선문 앞에는 엄청난 웅덩이가 생기면서 파리는 잿더미가 되더군요. 픽션이지만 끔직한 일이예요.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생기는 피해로 부터 인류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끝없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해야 겠어요.

 

  거짓말처럼 상쾌하게 개인 주일 아침 서둘러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에 오릅니다. 지난 밤새 내린 비에 깨끗하게 정돈된 콩코드 광장에 내려 321m 에팰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9시30분이던가 개관시간에 대어 맨 처음으로 루브르에 들어 갑니다.

  1,200 년 경,중세 왕이었던 필립 오귀스트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루파라라는 성을 세운 것이 1,360 년 샤를르 5세 치하에서 왕궁으로 확장 되었으나 프랑스 대 혁명 와중, 즉 1,793 년 "중앙 예술 박물관"으로 개관 되면서 루브르는 박물관으로 임무를 시작 했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불리다가 나폴레옹이 물러 나면서 오늘의 "루브르"이름을 되찿게 되었구요.
  현재 연간 약 500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는 세계적인 박물관은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의 대 루브르 공사 이후 무려 700 미터에 이르는 박물관의 넓은 공간을 오가며 유물을 감상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술적 안목이 없는 순례자가 인상에 남았던 것은 고대 동방관에 있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의 법전이었어요,기원 전 1,790년대면 바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으로 고향인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러 마리를 거쳐 하란으로 길고도 긴 이동을 하던 때가 아닙니까?
2.25미터 높이의 원추형 현무암 비석 위에 설형문자를 새겨 넣은 함무라비 법전은 당시의 관습법과 국가의 규율과 왕의 훈계를 적은 것이며 비석 머리 부분에 태양의 신이자 정의의 신이도한 샤마슈 신 앞에 서서 경배를 드리는 함무라비 왕의 모습이 너무 엄숙합니다.

  고대 이집트관은 상고대로부터 전 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이집트의 전 역사를 조감해 볼 수 있는 곳이지요. 영화 미이라를 보신 분은 런던에 있는 대영 박물관을 떠 올리겠지만 루브르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영 박물관은 입장료가 없습니다.그것은 보관 전시된 유물 중에서 자기나라 유물이 얼만큼 되느냐에 따라 자기나라 유물이 적으면(몇%인가 기준이 있는데) 입장료를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루브르에서는 대영 박물관은 남의나라 유물을 약탈한 문화재 도둑국가라고 비아냥거리지만 프랑스도 그점에 있어서는 오십 보 백 보가 아닐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루브르를 대표하는 밀로의 비너스와 니케아, 즉 승리의 여신과 미술 시간에 석고 댓상 할 때 꼭 그려보던 아그리파장군 흉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려야지요. 

  루브르 웅장한 계단 꼭대기에 군림한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과 밀로의 '비너스'는 같은 시기의 비슷한 작품이지만 이 두 여신은 수십 세기를 거치는 여정 동안 둘 다 역경을 겪었지요. 비너스는 팔을 잃어버렸고, 승리의 여신은 머리를 잃어버렸답니다. 머리 없는 미녀 승리의 여신은 BC203년경 로도스 사람들이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이랍니다. 1863년 사모트라 섬에서 발견되어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지요. 그래서 '니케(Nike)'라는 별명이 붙었대요. 니케는 그리스어로 '승리'를 뜻한다지요. 유명한 미국 스포츠화 상표도 여기서 나온 이름이고, 그 상표의 로고 역시 승리의 여신의 날개 모양에서  따왔어요.

  니케아의 여신을 계단 아래에서 바라봅니다. 여신이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한대요. '나는 시간과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맞서 이겼노라고.'(그리스인이 들려준 그리스 신화에서) 완벽하게 표현된 늘어진 옷자락의 주름과 도약 직전의 힘차고 성스러운 날개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아마 그토록 당당하게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그안에 담긴 영혼 덕분이었리라. 왜냐하면, 그리스 조각은 부동자세로 율동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조각된 대리석 덩어리 안에 내면의 불꽃, 생명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말예요.  
  미술책에서 보았던 유명한 조각품이 너무 많아서인가 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워둔 모조 조각품으로 착각하기 딱 맞을 정도로 루브르가 얼마나 많은 미술품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요.

  회화관으로 넘어가는 회랑의 창문 너머로 나폴레옹 광장에 꽉찬 페이의 "유리 피라미드"가 정교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4천 년을 넘나드는 루브르 박물관 바로 그 바깥 광장에 현대적인, 정교하다 못해 치밀한 아름다움으로 시원하게 품어내는 분수를 헤치며 우뚝 솟아오른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의 기하학적인 모습, 오~! 우리 시대에도 이런 훌륭한 예술가가 있다고 항변하는 듯 했습니다.
회화관으로 넘어가면 다비드 "1804년 12월2일,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의 화려한 그림을 보게 되지요. 나폴레옹이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아 자기손으로 왕관을 쓰려고 하는 그 오만함, 왕관 수여의 권한을 빼앗긴 교황의 화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순례의 기쁨을 그대는 이해 할 수 있을까요?
  가슴을 들어낸 여인이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를, 한 손엔 착검한 소총을 잡은채 뒤를 돌아보며 총과 칼을 잡은 빠리 사람들을 독려하고 있는 그림 앞에 섰습니다. 전쟁 터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여인의 옆에는 양손에 권총을 쥐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소년과 수 많은 사람들이 쓰러진 시체, 자욱한 화약연기,.. 이 그림 앞에 서면서 단박에 알아챘습니다, 외젠느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원래 제목 (1830년 7월 28일.바리케이드를 향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관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나 신 정부가 즉시 이 그림을 사들이고 35년 동안 한 번도 일반에게 공개시키지 않았답니다. 이 그림이 일반 시민들에게 너무나 자극적이라고 생각 해서인 데 현대인들이 모나리자의 애매한 미소에 매료 당하기 전 까지 미로의 비너스와 함께 루브르에서가장 보물로 꼽혔답니다.

왕권은 신으로 부터 나온다고 오만했던 태양왕 루이14세,16세의 폭정에 분연히 일어섰던 프랑스 대 혁명 때 여인과 소년까지도 피비린내 나는 거사에 참가했답니다.  이 프랑스 대혁명은 온 유럽으로 퍼져나가 수 많은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으로 나아가게 했던 위대한 거사, 아니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했던 혁명이잖습니까?
  재미 있는 얘기 해 드릴까요.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이 뉴오크의 위대한 상징인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여신"의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것은 미국 독립 100 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가 F.A.바르토르디에게 여신상을 제작 할 것을 의뢰합니다. 지금도 맨하탄에 씩씩하게 서 있는 "미스 리버티"는 바로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에서 그 이미지를 따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오!! 여기에서도 만나다니, 치마부에가 그린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동정녀 마리아"와 지오또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자 프란치스꼬"를 보노라면 아씨시에서 만났던 성인을 다시 만난듯 반갑고말고요.
아무래도 순례의 길이었으니 수 많은 그림 중에도 베로네즈의 "가나의 혼인잔치"가 눈에 확 뜨이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비파를 타는 전형적인 잔치집의 떠들석한 분위기,동네 사람들과 어울린 예수님과 성모님, 뒷 편에는 고기와 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산한 잔치집 사람들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 구름이 그려진 지극히도 평범한 그림 앞에 섭니다. 바햐흐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예수님의 첫 기적이 나올까 긴장하면서 이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와 함께 어울리실 뿐 아니라 흥겨운 잔치에 스스럼 없이 참석하시어 술잔도 기울이시고 노래도 부르며 기쁘게 웃고 떠드는 참 천진한 분이신가 봐!..."
가나의 혼인 잔치의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여 "골고다" (베로나 성당의 병풍을 위해 만테그나가 그린)에서 비통한 모습을 보이는 성모님을 건성으로 지나칩니다 ...그 유명한 "모나리자"가 다가 옵니다. 제가 모나리자 앞에 섰다니까요!!

  관광 시즌이 아니어서 쾌적한 모나리자 앞에는 우리 일행밖에 없어서 버릇처럼 카메라를 꺼냈지만 루브르 전체에서 단 한 곳, 모나리자는 촬영이 않된다는군요,(카메라 플래쉬로 부터 그림을 보호 하려는 조치를 보아도 모나리자가 수 많은 예술품으로 가득찬 루브르에서의 위치를 알 수 있겠지요.)
  1,495년 피렌체의 귀족인 프란치스코 델 조콘드와 결혼한 모나리자 게라르드니의 얼굴을 그린 것으로서 "라 콘조다"라는 모나리자의 별칭은 이 귀족의 이름에서 비롯 된 것이지요.

리자(Lisa)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그녀가 사실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지요. 사진과 복사본으로 숱하게 보아왔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루브르 원화 앞에 있노라니 거의 불가사의한 느낌이네요. 나를 조롱하는 것같아 보이는가 하면 그녀의 미소 속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는 이 오묘한 전율, 내 마음 속을 타고 흐르는 이 느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일 아꼈던 이 그림은 루브르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 수수께끼 같은 미소,놀라운 솜씨로 형상화된 얼굴,빛이 한 형태에 머물지 않고 확산되도록 서서히 엷어지는 명암처리.그리고 인물 뒤의 풍경을 감싸고 있는 비 현실적인 안개....."
해설자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어도 내 눈에는 입가에 삐죽 내보이는 미소,오묘한 미소가 보였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미소로 또는 우울해 보이거나 슬픔에 젖은 귀부인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설명에 내 마음은 그럴 수 밖에...
"그분"을 만나뵙고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 따뜻한 어깨에 기대어 넘치는 설래임과 두근거리는 마음을 그대는 아시나요!!
대단하다고 소문 난 그 어떤 것도 막상 와보면 실망하고 만다는 세상의 유명세에 비해서 모나리자와의 만남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나를 압도하는 벅차오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쉽게 자리를 옮길 수 없었습니다.

  회랑 곳곳에 준비된 루브르 기념품 가게에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소개 책자가 불실하여 속이 상해서 영어판 한 권 사서 옵니다. 그나마 집에 돌아와서 그 책을 보며 정리를 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유물과 그림에 내 구식 머리는 헝크러져 아무 것도 기억 할 수 없었을겝니다.

  맑았던 파리는 거짓말처럼 그 사이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버스 까지 달려갈 수 밖에...서둘러야 했습니다.
왜냐고요? 주일 미사를 드려야 하거든요.

  어저께 부제품을 올렸던 갈멜 신학교로 돌아옵니다. 주일 미사는 몇 분의 유학생 신부님, 부제님과 대성당 지하 "복자 프리데릭 오자남 무덤 경당"에서 드립니다.
프랑스 대 혁명 때 순교하신 분들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자그마한 경당, 제대에는 "너희는 서로 사랑 하여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이 십 평 정도될까 조그맣지만 순교자의 신심이 넘쳐 흘러 저절로 경건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미처 몰랐는데 본당 빈첸시오회원이 일러주더군요, 오자남 복자가 바로 빈첸시오회를 창설하신 분이라네요.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껄...제가 바로 빈첸시오 아닙니까.
의아하시겠지만 프랑스 대 혁명 때는 왕을 비롯하여 귀족들과 많은 성직자들이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처형되고 핍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민중과 격리된 체로 지배자와 권력에 아부 하였던 교회는 민중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스스로 겸손하게 가난한 민중을 향해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사무엘 상권, "사무엘아!사무엘아!사무엘아!",

오늘도 우리를 부르는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주님, 말씀 하십시오.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했던가요?
늘 깨어서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독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부제 서품식에 참석하러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오신 신부님들과 리옹 역 근처 한식 집에서 정갈한 김치찌게로 이별의 점심을 나누고 T.G.V 때제베를 타러 갑니다.
  이제 루르드입니다, 약 5시간 반 정도 걸리는 먼 거리,남쪽으로 스페인 접경에 자리한 피레내산맥을 이고 있는 산촌 한가한 시골 루르드가 이제는 때제베가 설 정도로 세계각국에서 순례자가 줄을 잇는 유명한 성모님 발현지로 거듭 태아난 곳이 아닙니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때제베가 지나며 보여 주는 프랑스의 한가한 농촌을 구경하며 마음은 벌써 가냘프지만 곱게 생긴 성모님 품에 뛰어 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프랑스는 복 받은 나라인지라 차창 밖에 비치는 농촌은 언덕도 드문 평지,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가 시원스레 펼쳐 지고 있었습니다, 한 눈에도 기름진 옥토임을 알 수 있는 포도밭이며 고호가 그리도 반했던 해바라기 밭과 올리브와 밀 밭인가...우리나라의 5배 크기의 프랑스가 거인 처럼 당당하게 우리를 압도하고 있었답니다.
포도주로 유명한 보르도역을 지날 때는 어둑어둑 해가 진 저녁 때여서 보르도산 포도주 한 잔 기울일 법 했지만 교포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꺼내지 못하고 캄캄한 밤11시가 되어서야 루르드에 도착하여 5분 거리의 호텔로 버스를 타고 갑니다.
비수기라 호텔들은 거의 문을 닫고 쉬임없이 흘러가는 가부강 물소리가 적막한 루르드를 깨울까 염려 될 정도로 고요했습니다. 반가운 한식 도시락을 글쎄 밤 12시에 까먹고 마음도 급하게 루르드 성지를 찾아 나섰지요. 캄캄한 밤길, 길가의 까폐도 모두 문을 닫아 온통 어두운 데다가 가로등도 드문 밤 길을 걷는 우리만의 순례, 호텔에서 내리막 길을 5분은 걸었을까 어둠 속에 우람하게 하늘을 찌르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의 대성당" 옆으로 돌아서니 오!! 우리를 기다리신 듯 두팔을 활짝 벌리고 맞아 주시는 성모님, 마사비엘 동굴은 신비로웠고 겨울임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은 나뭇 잎 속에서 저리도 고운 어머니, 노뜨르 담, 우리들의 어머님이 잠도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닌가!!
기적의 성수가 나오는 샘에는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샘물이 콸콸 솟아오르고 성모상 앞에는 사람 키보다 더 큰 촛불 여남 자루가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슴 깊숙이 타고 흐르는 시원한 기적의 성수를 마시며 고향에 온듯, 어머니한테 안긴듯 아득하게 밀려오는 달콤한 피로함, 밤을 새워 흘러 가는 가부 강 물 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고도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그리운 그대여! 순례 길을 떠나서 가장 깊게 잠든 순례자가 보내는 밤 인사를 그대는 들었는가??
피래네산맥 그 높은 만년설이 녹아 가부 강으로 흘러 와서 멀리서 온 순례자의 귓가에 속삭이는 속삭임,
   "잘왔어! 참 잘왔어...
   성모님이 얼마나 널 기다렸는지 모르지?
   멀리 돌아 온 길,
   이제 성모님 꼭 잡아야지
   그럼, 꼭 잡아야 하고 말고
   그래, 잘 왔어! 잘 왔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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