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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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밑으로 밑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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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2-03-27 ㅣ No.3454

3월 28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요한 복음 13장 1-15절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한없이 밑으로 밑으로만>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다가 발등을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한 탓으로 상처는 잘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다 제가 또 가려움증에 약해 자주 긁다보니 상처 부위는 심하게 곪기 시작했고, 상처는 점점 발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급기야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저는 가까운 동네 의원을 찾아가게 되었고, 의사선생님의 처방에 따라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주사를 놔준 간호사 아가씨가 "아직 가지 마시고, 저리 처치실로 들어가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소독약이 가득 담긴 대야와 솜뭉치를 들고 간호사 아가씨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왕창피스럽게도 제 발 앞에 대야를 놓고 발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심하게 곪아터져 심란한 발을 예쁜 간호사 아가씨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저는 극구 사양하면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만, 간호사는 또 기어이 저를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제 심란한 발의 상처를 소독하고 닦아주었습니다. 아직도 그때 그 순간의 난처함과 송구스러움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발은 어떤 면에서 여러 신체구조 가운데 가장 숨어있는 부분입니다. 한편으로 발은 가장 많은 역할을 하지만 가장 소홀한 대접을 받는 부분이고 또 우리가 별로 신경 쓰지도 가꾸지도 않는 취약부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의 발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어른들 앞에 갈 때는 꼭 양말을 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죄인인 인간의 손도 아니고 꼬랑내 나는 발을 씻겨 주십니다. 만왕의 왕께서 가장 말단 공무원의 상처난 발을 씻으시고 또 그 발에 입을 맞추십니다. 당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이해할 수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족례를 거행하셨을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겸손은 약자이기에, 또는 무지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이나 비굴함이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어놓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는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갑니다. 왜냐하면 심연의 밑바닥 거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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