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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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눈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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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2-12-25 ㅣ No.4366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루가 2장 1-14절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하염없이 눈물만>

 

요즘 꽤 많은 북쪽 동포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남쪽으로 넘어온 형제들은 일정 기간 정착을 위한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가야만 합니다. 물론 정부 당국에서 상당히 신경을 쓰는 편이어서 어느 정도 정착금이나 보조금이 지급되기에 당장 생계에 큰 곤란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착 기간이 끝나고 난 그분들이 겪어야 할 가장 큰 고충은 문화충격입니다. 그분들이 낯설고 물 설은 남쪽에 정착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은 오랜 분단 상황이 가져다준 사고방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 언어 사용의 차이에서 비롯된 절실한 고독감이다. 같은 국어를 쓰지만 때로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사용하는 어휘들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남쪽 사람들과 적응하기도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은 남쪽의 한 도시로 정착을 시도한 한 형제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겠지?"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의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왠걸. 아직도 정착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말투도 다르고 생김새도 어딘가 모르게 다른 그를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고, 숫기가 별로 없었던 그 분은 바깥 외출도 삼간 채 아파트 안에서만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도 그리었던 그는 돌아갈 길이 먼 형제의 손을 꼭 잡고 큰 대로변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 성탄 대축일,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몸소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그 숱한 우리의 죄악과 나약함,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사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 복된 은총의 날, 우리 주변을 한번 주의 깊게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주변에 아기 예수님 같은 분이 계시지는 않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 같은 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늘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의 지지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겠지요.

 

일주일 전에 미사 후에 만난 한 할머니의 말씀이 지금까지 제 귓전을 울립니다. "성전 건물을 멋있게 짓는 것도 필요하고, 대규모 교회 행사를 위해 투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교회다운 교회, 하느님이 언제나 머무시는 살아있는 성전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은 허전한 가슴을 달랠 길 없어 속마저 쓰라린 탈북자 형제들입니다. 만기출소를 해도 마땅히 오라는 곳 한 군데도 없는 재소자 형제들입니다. 이 추운 날에도 박스 하나 손에 들고 "어느 방향으로 머리를 눕혀야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 노숙자들입니다.

 

오늘 성탄 구유 앞에 무릎꿇고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조용히 경배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그저 모조 마구간 안에서 잠시 머무시다가 주님 공현 대축일에 사라지고 말 인형 예수님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가슴 안에 일년 내내 살아 숨쉬어야 할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그 숱한 부족함과 진홍빛 같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다시 한번 누추한 우리 각자의 마굿간을 찾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그분이 오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수 있도록 우리가 죽는 일입니다. 그 모진 악습과 지독한 이기심과 철저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죽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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