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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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현대사 - 민중을 위한 경제 -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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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5-05-20 ㅣ No.88

민중을 위한 경제 -박현채
 
 
 
 
 

박정희 신화의 뒤에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세계화의 광풍과 민주화의 요구가 부딪히고 있는 2004년 한국사회,
그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안정과 성장으로 기억하는 박정희시대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얽힌 숙제들은 다름 아닌 지난 시기 외면하고 풀지 않은 모든 것에서 오는 원죄이다.
자립을 외치면서도 종속의 길을 걸어간 박정희,
그러나 그 60-70년대 한국경제가 가야할 길을 외친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성장보다 분배를, 종속보다 자립을, 대기업보다 노동자 농민을 말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경제학자 박현채였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치열한 실천, 목숨을 걸고 글을 쓰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가 정식교수로 발령을 받아 조선대 강단에 선 것은 88년, 그의 나이 55세가 되어서였다.
그나마 3년 남짓 강단에 섰던 그는 쓰러졌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16살의 소년 빨치산이 되었고, 이후 서울대 상대를 들어가면서 '민중을 위한 경제학'은 그 스스로 짊어진 사명이었다.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다른 모든 무장이 해제된 상태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글이었다. 평생 공안당국의 가장 좋은 상품이 될 위협 속에서도 그는 쓰고 또 썼다.
필요하면 뭐든 공부해서 쓴다, 어디서 누가 요구하든 쓴다,
이것이 박현채의 글쓰기였고 그 바탕은 제민족과 가난한자에 대한 충만한 사랑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64년 인혁당사건과 79년 통혁당재건기도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민중적인 것이 곧 민족적인 것이다"
한국 자생적 사회과학의 대부 박현채.
박현채는 그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의 대표작 <민족경제론>(1978), 거기에는 진보진영의 묵계적인 공통의 문제의식,
공통의 언어, 민족과 민중에 대한 애정이 들어있다.
가장 민중적인 것은 가장 민족적이고, 가장 민족적인 것은 가장 민중적이다.
이것이 60년대 이후 그가 쓰러지기까지 30여년간 진보학계와 사회운동가
사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독보적 존재, 박현채의 힘이었다.

왜 지금 다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인가...
끝나지 않은 박정희의 신화, 박현채의 경고
한강의 기적, 그 뒤편에는 박정희와 다른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
그 시절에 민중과 민족을 이야기한 사람,
그는 분단의 역사 속에 분단의 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고통스럽게 산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화의 흐름 속에 민족과 자립을 말하는 박현채의 목소리가 있다.
그가 주장한 그러나 한국사회가 외면해온 숙제가 있다.

 

민중을 위한 경제 -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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