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인물 현대사 - 재야의 골짜기로 남다 - 예춘호

스크랩 인쇄

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5-05-20 ㅣ No.83

재야의 골짜기로 남다 - 예춘호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정치적 신념과 지조를 지킨 정치인은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예춘호'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신념과 지조를 지킨 정치인이었다.

'소신을 꺾고 타협하면 일신의 영화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순간은 짧고 오욕은 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쉬운 길을 갈 수가 없었다.

 

69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 파동 때 그는 공화당의 창당멤버로서 사무총장까지 지낸 여권의 핵심이었지만 헌법을 파괴하는 3선개헌에 소신껏 반대를 선택했다.

80년 유신독재의 종말과 함께 맞은 '서울의 봄' 시절에도 그는 동향의 정치인 김영삼 대신 호남 출신의 정치인 김대중을 선택했다. 그것은 출신지역을 떠나 순수히 누가 더 나은 정치지도자인가 하는 그의 판단에서 나온 소신있는 결단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그 후 함석헌, 문익환, 이문영 등과 함께 재야의 리더가 되었다.

전두환 독재에 맞서 양 김씨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지만 그는 양 김씨처럼 정치적 이익을 찾지는 않았다.

87년 대선에서 양 김씨는 결국 후보단일화에 실패했고 이로써 민주세력은 분열됐다.

그는 양 김씨로 대표되는 기존의 정치에 반기를 들고 제정구, 원혜영 등 소장 정치인들과 함께 '한겨레 민주당'을 창당해 88년 총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는 3선을 안겨주었던 고향 영도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정치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을 수도 있었던 그는 신념과 지조를 지키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험난한 '재야의 길'을 선택했다.

세상의 잣대로만 본다면 그는 실패한 정치가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정치'가 아닌 '국민의 편에 서는 정치'를 선택했고 끝까지 그 초심을 잃지 않았으며 마지막엔 깨끗이 정계를 떠나 '재야의 골짜기'로 남았다.

 

재야의 골짜기로 남다 - 예춘호
 


613

추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