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8일 (화)
(녹) 연중 제8주간 화요일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인물 현대사 - 진보,사형당하다 -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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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5-03-28 ㅣ No.80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사형수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진보정치가,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획득,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했던 현실정치가,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에 대한 사형집행이었다.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양명산이란 인물을 통해 북과 접촉하며 정치자금을 받고 기밀서류들을 넘겨준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5년형을 선고했다.그러나 검찰의 항고로 열린 2심 재판에서 1심에서 무죄로 결론난 간첩죄를 적용,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50년대 중반 진보를 표방하며 '책임지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인 평화통일'을 당 강령으로 내걸고,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죽산 조봉암,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진보적인 혁신정당, 나아가 이 땅의 진보주의에 대한 사형집행과 다름없었다.그의 죽음 후 이 땅의 진보주의는 한동안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 전향했던 그는 48년 5.10 남한 단독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면서 현실정치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그는 좌익과 우익 모두를 거부하고 제3의 길 -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진보적인 현실정치가 조봉암의 죽음과 진보당의 실패는 한국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승만정권에 의해 법살(法殺)되었다'라고도 평가되는 조봉암의 죽음.
사후 5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복권되지 못하고 있는 진보주의자 조봉암의 재조명을 통해, 50년대 대한민국이 실험한 진보주의와 혁신정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향후 한국정치의 다양한 모색을 위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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