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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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현대사 - 전쟁의 폐허에 빛을 밝히다 - 에스더 레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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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5-03-28 ㅣ No.74

 

'나부인'으로 불리던 푸른 눈의 선교사 '에스더 레어드(Esther
J Laird)'.

그녀의 한국이름은 '사랑으로 덕을 베푼다'라는 뜻의
'나애시덕(羅愛施德)'이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한국의 마더 테레사'로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만큼 한국에서 보낸 40년의 세월동안 그녀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 있었고, 한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제치하인 1926년 美 감리교단의 선교사로 한국에 와 원주에 정착한
그녀는, 1966년 지병인 파킨슨병이 악화돼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주로 여성, 어린이, 결핵환자 등 그동안 국가가 배려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쳐나갔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 국가가
일체의 사회보장정책을 펴지 못하고 있을 때, 많은 수의 전쟁고아,
전쟁미망인, 결핵환자들이 그녀를 찾았고, 인생의 전환을 맞았다.가난한
이웃들과 평생을 같이 한 그녀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1. 한국 빈민속으로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



1926년 Miss Laird가 처음 한국에서 정착한 곳은 원주였다.

원주기독교여자사회관을 창설하여 영아원, 결핵요양원 및 부녀자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기존 선교사들의 사회사업이 주로 병원과
학교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것과 달리 Miss Laird는 직접 서민들 속에
들어가 함께 하였고, 그들 속에서 '나부인'으로 불리며 외국선교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2. 몸은 떠나있지만, 마음은 항상 한국에...



Miss Laird는 한국전쟁 시기 선교당국의 귀국 명령으로 미국으로
돌아간다. 미국에서 그녀는 마흔이 넘은 늦은 나이에 간호대학에 입학.
간호사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적극적으로 기금을 모으기 시작한다.
한국에 가져갈 약품, 병원도구, 음식 등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전쟁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지만, 언제든 한국으로
돌아가 전쟁의 상처를 돌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3. 전쟁의 폐허로 다시 돌아오다.



휴전협정이 체결될 당시 Miss Laird는 이미 쉰두살의 나이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52년 한국으로 돌아온 Miss
Laird는 대전에 사회관을 짓고 육아원과 탁아사업, 교육사업, 급식,
장학사업, 결핵요양원, 가족계획 등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Miss
Laird의 봉사는 1966년 파킨슨병의 악화로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4. Miss Laird의 희생, 작은 사회변혁을 이루다.



Miss Laird는 감리교선교사이면서, 超교파적이었으며 신자,비신자를
가리지 않는 공정한 사회사업가였다.

50년대 전후복구사업과 60년대 경제성장우선정책에 밀려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하며
한국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펼친 Miss Laird의 헌신적인 사회사업은
암울했던 한국 사회에 한줄기 빛이 되었다.

그녀에게 사회사업은 선교를 위한 봉사가 아닌 참사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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