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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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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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4-23 ㅣ No.171770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4ㄴ-50).”

 

 

 

1) 여기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인”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인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이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우리 교회의 신앙을 나타냅니다(요한 1,1).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이 말에서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라는

 

말씀도, “예수님은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외모’가 예수님과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기 때문에(1요한 4,12),

 

하느님의 외모가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이

 

왜 그토록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 아니라 한 인간일 뿐이라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을 섬기다가 억울하게

 

죽은 어떤 순교자의 희생일 뿐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 라는 ‘어떤 사람의 일’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이신 분이 인류 전체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 되고,

 

그 속죄의 효과는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은 메시아께서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정복하신 일이 되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일이 됩니다.

 

 

 

3)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는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4.9).”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빛’은 구원과 생명을, ‘어둠’은 죽음과 멸망을 상징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죽음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4) 47절의 말씀은, 앞의 3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라는 말씀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48절의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심판받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곧 심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받은 상태가 되는 것은, 마지막 날이

 

되기 전에, 즉 ‘지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지금’ 구원이 시작되고,

 

반대로 ‘지금’ 거부하면, ‘지금’ 심판받은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내 말’, 즉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가리킵니다.

 

 

 

5) 49절은, ‘예수님 말씀’은 곧 ‘하느님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인데, 당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50절의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과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라는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는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서 말한다.”인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당신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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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활 제4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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