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MBC / 보도연맹 - II . 산자와 죽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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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inuit-_] 쪽지 캡슐

2012-05-28 ㅣ No.1545

 

 

 
 

이채훈 (문화방송 시사교양국 PD, 이제는 말할수 있다 - 보도연맹편 담당) /
"보도연맹에 대하여" 중 일부 발췌

http://blog.daum.net/ych7340/187



진정한 비극, 일사불란한 침묵



학살 사건 자체보다도 더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의문은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철저히 은폐될 수 있었을까 하는 기막힌 의문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아버지 세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도,

단 한명도 얘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취재를 마친 후 내린 결론은, 너무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입에 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놀랄 만큼 일사불란한 침묵 뒤에는 ‘입 열면 다친다’,

‘바른 소리 하면 손해본다’는 집단적 가위눌림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 갔다가 살아 나온 또 한명의 증인 권재효씨.

이 분을 인터뷰하는 동안 옆에 앉아 있던 부인 이동분씨는 내내 불안한 듯

“이 사람은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때 얘기하면 또 잡혀갈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창고에서 집단 학살이 일어난 충북 오창. 거리에서 만난 노인들은

PD가 이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그때 사람 많이 죽었지“라고 말을 꺼내다가

경계의 눈빛을 보내면서 “그런 건 왜 물어?”하면서 입을 닫아 버렸다.



보도연맹은 멀리 떨어진 일이 아니었다.

PD의 아버지 세대 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평생 한 번도 이 사건을 입에 올리신 적이 없는 아버지도 내가 이 프로그램을 한다니까

“20만명보다 훨씬 더 많이 죽었을 걸”이라고 하셨다.

프로그램 만들 당시 문화방송 사장을 지내신 김중배 선생께서도

형님이 보도연맹으로 희생됐다는 말씀을 하셨다.

방송이 나간 뒤 자기 가족이 보도연맹으로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제보 전화가 무수히 들어왔다.

이 사건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일사불란한 침묵,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망각에 반대하며



"친일파가 해방 이후에 온존했다"는 역사책의 표현은 과연 맞는 것인가?

친일파들은 정부와 군경의 요직을 모두 차지했으므로 '온존했다'는 표현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방 후 민중의 친일파 숙청 요구로 정치적 입지가 좁았던 친일파,

특히 고등계 형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강력하게 민중을 탄압했다.

일제 때도 이렇게 잔인하고 악랄하게, 무차별로 폭력을 휘두르며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나 죽여놓고 '빨갱이를 죽였다'고 말하면 모든 게 양해되는,

오히려 고속 출세의 밑천이 되는 시대였다.

대구에서 만난 이광달씨는 그 시대를 가리켜 주저없이 '악마의 시대'라고 불렀다.



학살 책임자들의 대다수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군림하며 살아왔다.

반면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들의 죄과에 대해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도연맹원 학살과 같은 끔찍한 일을 목격하고 나면

말조심을 안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은 기득권 세력의 안녕을 위해 아주 편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셈이다.



해묵은 상처를 들춰내자는 게 아니다. 누구를 단죄하자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인정하고, 정당한 사과와 용서를 도출하고,

그 토대에서 겸허하게 미래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방송을 낸 뒤 4년반이 흐른 2005년 여름. 최대의 학살 현장인 경산 코발트 광산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망각과 무관심의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진상 규명과 화해를 위해 힘을 써야 할 정부, 국회, 언론, 시민단체가 무관심한 이 현실 속에서

나마저 침묵한다면 나 또한 이 ‘무책임의 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발트 광산 현장으로 다시 달려갔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피해 주민들의 마지막 절규가 골프장 건설의 굉음 속에 파묻혀 사라지는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프로그램은 <1950-2005, 코발트광산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됐다.

그기고 2005년 12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 또한 한두번의 방송으로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국 인간은 시간과 망각에게 지배당하는 존재니까.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은 진실을 말하고 알리는 게

우리 유한한 인간의 도리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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