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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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청 신부님들과 본당 주임, 보좌 신부님들께 드리는 공개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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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 [kimism] 쪽지 캡슐

2017-11-24 ㅣ No.91130

저는 아내가 폭행당한 일과 본당 주임신부님과 사목회의 비상식적인 대처에 대해 글을 이미 올렸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번 폭행사건이 여성총구역장의 기질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지요. 오늘 글은 서울대교구청을 포함 본당에 계시는 모든 주임 또는 보좌신부님들께 드리는 글입니다. 제 아내가 겪은 폭행사건에 대한 팩트와 경과는 올렸으므로 그 이후 본당신부님과 서울대교구 높으신 신부님들에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합니다. ‘신부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지녔으므로 감히 교우가 비판을 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하시는 신부님들은 여기서부터 읽지 마십시오.

 

폭행 후유증으로 입원 치료 후 퇴원한 아내는 주임신부님을 직접 뵙고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10월초 새벽미사 끝나는 시각에 맞춰 본당을 찾았고 신부님과 작은 회의실에 마주 앉았습니다. 신부님과 아내는 대화를 시작하지만 서로 언어가 다른 사람처럼 겉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신부님에게 사제관에 찾아간 남편을 만나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물었지요.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어디론가 전화해) 내용을 들었고, 만날 이유가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대화가 쉽게 풀리지 않자 신부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냐, 요구사항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사제관까지 찾아온 교우를 그냥 돌려보낸 것은 신부님이 잘못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편에게 사과하십시오.’하고 요구합니다. 신부님은 굳어진 표정으로 신부에게 사과하라 마라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라며 사과를 거부합니다. 서로의 말이 허공을 맴돌자 신부님은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제가 신부님에게 신부님이 여성총구역장폭행일에 중재자로 나서지 않기로 판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제 판단은 제가 합니다. 어느 누구도 신부의 판단에 이유를 물을 수 없습니다.’라고요. 그 말씀을 끝으로 신부님은 먼저 회의실을 나가셨습니다.

 

본당의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으니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울대교구의 문을 두드려보았습니다. 하지만 대교구의 문은 더 크고 육중했습니다. 저는 단 한 분의 서울대교구청 신부님과도 통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통화를 한 것은 몇 분의 직원들뿐이었지요. 직원들 중에서도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신 분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나같이 본당 일에 교구가 간섭할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심지어 어느 부서의 한 직원은 본당 신부님이 해결의지가 없으면 민사소송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충고했습니다. 하루는 전화를 받은 사무처 직원 분께 조심스럽게 신부님이 자리에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직원 분은 신부님과 직접 통화는 안 된다. 직원을 통해 사전에 용건을 말해야 한다. 지침사항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지침사항대로 직원 분께 용건을 말하고, 직원분의 메일주소로 신부님께 보낼 편지를 발송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제 편지를 보셨는지, 아니 메일이 전달이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서울대교구청 신부님들과 본당 신부님들께 묻겠습니다. 신부님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낮고 어두운 곳을 찾아 이웃의 아픔을 감싸주어야 할 신부들이 교우들의 전화조차 걸러 받는 것은 어디에 나오는 교리이고 누가 내린 지침입니까? 신부들이 스스로 권위를 높이면 한국천주교위상도 따라서 올라간다고 생각하십니까?

, 본당에서 발생한 일에 주임신부가 해결의지가 없는데도 교구가 간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교구는 왜 필요합니까? 교구장과 주교는 무엇을 하는 분들입니까? 교구의 주된 업무가 기껏 본당에서 보내온 교무금을 받는 것인가요? 신부를 본당으로 파견하는 교구가 본당 일이나 주임신부 결정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게 저만 이해가 안 되는 논리인가요? 교구가 정녕 본당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면 본당에 신부를 파견하는 일도 멈추고 교무금을 거두어가는 일도 중단해야 합니다. 정말 그게 교구의 뜻이라면 본당일은 지혜로운 교우들에게 맡기십시오. 초등학생들도 알만한 상식적인 일을 교구가 모른척하며 오랜 인습을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거대한 가톨릭교단이 최소한의 자기 검열 장치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서울대교구 150만 교우의 신앙적 운명을 본당주임신부 230명의 개인적 판단에 맡겨버린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신부들끼리 서로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적당히 눈감고 침묵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우리는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한국천주교는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자생천주교라는 전통을 지녔습니다. 선조 교우들은 신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깨우치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스스로의 판단으로 순교까지 결심한 훌륭한 분들이었지요. 순교자들의 후손들인 본당 교우들도 누구의 도움 없이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말입니다. 전통이란, 그 정신을 올바로 계승해 후대에 이어주는 정신적 유산을 말합니다. 그 정신적 유산을 지켜내고 계승하라고 교구가 있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오늘날 본당의 교우들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순교자들의 후손들이란 게 믿겨지십니까? 이제 교우들은 눈으로 보고도 본 것을 말하지 못하고, 귀로 들은 것도 의심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모두 본당 신부의 몫일뿐입니다. 교우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를 하고 교무금을 내는 것이 전부입니다. 신부의 결정이 곧 법이며, 그것을 어기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능력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선물입니다. 누가 감히 지혜로운 교우들을 훈육하고 입맛대로 길들이라는 권한을 신부에게 주었습니까? 예수님조차 스스로 낮추시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부의 소임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당신들을 교육시키고 신부로 키운 것은 주교도 교구장도 아닌 교우들입니다. 신부가 된 지금도 당신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교황청도 교구도 아닌 교우들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성당의 공복이 되어야 할 신부가 본분을 망각하고 주인이 되어 교우들을 부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까? 비정상 속에서도 한 몸 편안하고 겉으로 평화로우면 그만입니까?

신부의 개인적인 판단이 상식에 어긋날 때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이 오히려 살아있는 가톨릭 정신이 아닌가요? 신부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이 가톨릭의 교리라면 독재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신부님 앞에서 말을 꺼내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신부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서로서로 입단속을 하게 길들인 것은 차라리 죄악에 가깝습니다. 신부가 내린 판단은 그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완전무결한 것이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이 땅의 천주교인들이 정녕 경외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살아 계신 하느님입니까 교구청에 계신 주교입니까? 살아계신 예수님입니까 본당 신부입니까? 서울대교구의 신부님들은 대답해 보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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